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won Mar 22. 2024

자기다움을 만들어주는 환경을 지키는 일에 대해

사진작가 어빙 펜Irving Penn과 그의 촬영 스튜디오

사진작가 어빙 펜Irving Penn과 그의 촬영 스튜디오

어빙 펜Irving Penn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그의 사진을 한번쯤 본 적은 있을 것이다. L의 경우도 그랬다.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 어빙 펜의 이름은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전시회에 들어선 지 10분도 안되서 '어! 이 사람이 아무래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리마의 흑백 사진을 찍은 장본인인 것 같은데?' 라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5분 만에 그는 자기가 가장 좋아한다는 그 사진을 마주했다. 로고를 박거나 서명을 적어내지 않아도 창작물 만으로도 작가의 정체성을 담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진 능력 아닐까. 세상에 존재하는 (그리고 존재했던) 모든 창작자들이 꿈꾸는 경지일거다.


Cafe in Lima


어빙 펜의 사진에는 특유의 고요함과 우아함이 있다. 그 마법의 비밀을 기술 용어와 미학 개념을 동원해 해독해 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찾은 한가지 확실하고 단순한 이유는 그가 고요하고 우아한 곳에서만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다. 이번 샌프란시스코의 드영 뮤지엄De Young Museum 전시회에 실린 사진들은 모두 실내, 그것도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다. 북향으로 높게 난 창문으로 부드럽게 쏟아지는 진주색 빛을 그는 가장 좋아했다. 배경이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고 사진작가가 완전하게 빛과 그림자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어빙 펜이 주로 시간을 보내고 작업을 했던 환경이다.





그가 실내 촬영을 고집하게 된 데에는 커리어 초반의 어느 경험 때문이었다. 펜의 인물사진 작가로서의 기량과 잠재성을 확인한 보그 편집장이 그의 명성을 한껏 띄우고자 보낸 파리 패션쇼 <더 콜렉션The Collections>에서 그는 날개를 펴는 대신 잔뜩 움츠렸다. 이벤트에 참석하기 위해 급히 산 정장 자켓 만큼이나 그는 "현장"이 불편했다. 함께 참석한 다른 사진작가들의 경쟁적인 분위기와 이벤트 관계자들의 흥분, 화려한 장식은 펜을 완전히 압도시켰다. 그는 패션쇼를 빠져나와 파리 어느 구석의 어느 오래된 건물을 발견했다. 전기도 물도 나오지 않는 텅텅 빈 꼭대기 스튜디오에서 그는 이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곳에 모델들을 불러 자신만의 촬영을 시작했다.



나는 실내 촬영만 고집하게 된 어빙 펜의 철학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아니, 그보다 먼저 현실적으로 비행기표까지 사서 멀리 보내 놓았더니 시키는 대로 현장 촬영은 하지 않고 낡은 건물을 임대하는 데에 돈을 쓴 이 젊은 사진작가를 이해하고 지지해준 그 보그 편집장을 헤아려보았다. "야 이것도 다 경험이지, 하면서 배우는거야." "너가 뭘 몰라서 그래. 현장에서 빠르게 작업하고 생생하게 담아내야 돈을 제대로 벌 수 있어." "현장도 하고 실내도 하고 다 해봐야 진짜 사진작가지." 어빙 펜은 우리처럼 이런 식의 충고를 들어본 적이 있었을까? 그런 말을 들었더라도 묵묵히 실내 촬영을 고집할 수 있었을까?


좋고 편안한 것만 계속 하고, 글도 썼던 글을 반복해서 쓰는 것 같고, 그래서 인생에 발전이 없는 것 같아 싫은데 또 이런 생각을 하는게 너무 자기계발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것도 싫다고 말하는 글친구들에게 어빙 펜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얘들아. 어빙 펜은 스튜디오 작업을 너무 좋아해서 해외  활영 갈 때도 꼭 현지에서 스튜디오를 빌렸고, 스튜디오를 빌릴 수 없는 환경이면 특수제작한 휴대용 촬영 스튜디오를 들고 갔대. 그렇게 좋아하는 거 잘하는 거 하면서 무려 70년 가까이 일하시면서 명성을 유지하셨다고. 맨날 실내촬영만 했다고 후대 사람들한테 욕먹는거 봤어?"


Cecil Beaton, Irving Penn reviewing camera negatives for Chimney Sweep, London, 1950


어빙 펜은 보그에서 66년 동안이나 일한 경력 때문에 패션사진작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하이패션 드레스로 치장한 날씬한 백인 여성들만이 그의 피사체는 아니었다. 정물 사진도 찍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히피문화가 태동할 때는 지옥의 천사들 오토바이 클럽Hells Angels나 해이트 애시버리Haight Ashbury의 방랑자들도 담았고, 노년기에 들면서는 담배꽁초와 시들어가는 꽃에 주목하기도 했다. 그는 커리어 여정 내내 실내촬영이라는 기본 캔버스를 바꾸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을 했다.


<Worlds in a Small Room>라는 이름의 시리즈도 이 다양한 실험들 중 하나다. 바로 이 프로젝트에서 어빙 펜은 특수제작한 휴대용 촬영 스튜디오를 들고 다니며 파푸아뉴기니, 모로코, 베냉 등 다양한 문화권의 지역 사람들을 카메라 앞으로 초대했다. 피사체들은 여전히 고요하고 우아했다. 그들의 눈빛은 강렬했고 조명은 다정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백인' '남성'의 일방적 gaze(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파푸아뉴기니 남성들이 입는 옷의 패턴과 모로코 여성들이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방식과 베냉 어느 부족의 늠름함을 담은 단체 사진을 보며 백인들과 서양사회가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어빙 펜의 그 휴대용 스튜디오가 피사체의 삶의 맥락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식민주의 시대에서 서양인들이 반복했던 그 과오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빙펜이 <Worlds in a Small Room>으로 받았던 비판은 넓게 보면 창작자가 특정 창작 환경을 고집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위험이다. 구축해놓은 템플릿 안에 누군가를 초대할 때 그 누군가의 맥락과 사연과 그가 가지고 있을 그 만의 '템플릿'과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에 대한 문제다.


어빙 펜이 정제된 실내 환경을 작업 공간으로 선호했던 것은 빛 때문 만은 아니었다. 그는 피사체의 심적 상태에도 크게 신경을 썼다. 인물이 긴장을 풀고 편안한 상태에 있을 때 최상의 사진이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편한 청바지 차림으로 모델을 맞이했고, 촬영에 바로 돌입하는 대신 커피 한 잔을 대접했다. 촬영 세션 중에도 계속해서 부드럽고 다정한 말투로 모델들을 안내하곤 했다. 나는 그가 파푸아뉴기니에서 얼마만큼 그러한 '소통'의 작업을 해낼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가 소통에 실패했다면,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그 어색함과 긴장이 사진에 담긴 거라면, 우리는 바로 그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것 아닐까.



파리 콜렉션을 빠져나와 스튜디오를 빌렸던 어빙 펜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 30대 초중반은 축적된 경험의 양을 고려해보건대 자신이 최상의 실력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 계속 반복하고 강조하면서 전달하고 싶은 주제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는 시기인 것 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편안한 것, 자기다울 수 있는 환경, 최상의 실력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아는 것은 편협함이 아니라 자기이해가 아닐까? 전시회 출구 곁에 마련된 팝업스토어에서 '사진 잘 찍는 법'이라는 직관적인 타이틀을 단 책을 충동구매하면서 생각해본다. 물론 가끔씩 자신의 울타리를 건드려 보거나 아니면 적어도 울타리를 수리해보는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혹은 어느 순간 관성이 노력의 속도를 앞지른다면, 언제든 편협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 있다. 어빙 펜 역시 계속해서 피사체를 바꾸고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하지 않은 채 예술을 방패삼아 오지의 원주민들 같은 '이색적인 대상'을 찍는 일에 빠져 있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평을 받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어빙 펜의 휴대용 스튜디오와 같은 존재가 있다. 내가 섬세하게 잘 다룰 수 있는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 환경, 온도, 분위기. 내가 세상을 관찰하는 방식을 가장 잘 닮아 있는 환경. 아무리 반복해서 말해도 지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주제를 가장 즐겁고 편안하게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 그곳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 곳의 한계가 때로는 나의 과오나 단점을 드러내더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그곳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과오를 드러내준다면 얼른 배우면 된다. 자주 찾아가주고, 또 누군가를 자주 초대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의 창작의 세계를 우아하고 고요하게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의 사진이 더 보고 싶다면: 



매거진의 이전글 샌프란시스코 동네 서점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