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 테라피 상담 후기
삶의 방향성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상태를 견디다 휴학을 택하는 대학생들이 많다. 나에게 상담 신청을 걸어오는 많은 친구들도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 신청서에는 때로는 추상적으로, 때로는 매우 상세하게 고민이 적혀있다. 문장의 길이나 단어의 구체성에 관계없이 그 속에서 느껴지는 고뇌와 어지러움과 길잃은 열정, 그동안 쏟아부었을 노력의 크기는 매한가지다. 한마디로 성실한 친구들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대학생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스물두살의 나는 교환학생을 떠났다. 가까운데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멀리 해외에서라도 찾아보아야 겠다는 심산이었다. 스페인어 전공을 십분 활용해 멕시코 시티의 어느 대학교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택했다. 남들이 흔히 가지 않는 곳을 택했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물론 스페인어 학부 학생들 사이에서는 흔한 행보이긴 했지만.) 그러나 지구 반대편에서도, 교환학생 프로그램의 끝에 다다라서도, 마음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아니, 더 혼란스러웠다.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돌아갈 수 없었다. 멕시코에서 마지막 기말 시험을 치루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날, 충동적으로 뉴욕으로 가는 비행티켓을 샀다. 현지 친구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선 쫓기듯 뉴욕으로 날아갔다.
아직도 뉴욕에서의 첫날 밤을 또렷이 기억한다. JFK 공항은 흰눈으로 뒤덥혀 있었고, 회색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민가방을 들고 불쑥 찾아온 사촌에게 언니는 방 하나를 내주었다. 따뜻하고 정갈하고 적막한 방에 불쑥 들어앉은 지저분하고 꾸깃하고 비대한 이민가방이 꼭 내 모습 같았다. 내가 그 때 까지 가진 유일한 계획은 뉴욕행 티켓을 사고 뉴욕에 날아오는 것 뿐이었다 (극 F임이 여기서 드러난다.) ‘졸업하면 뭐하지?’라는 대답은 커녕 “내일 뭐하지?”라는 질문에 조차 답할 수 없는 상태 임을, 그저 대학생의 취업준비의 길에서 막막함과 자괴감에 도망쳐나온 피난민의 신세임을 자각했을 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한참을 울었다.
사촌언니 가족의 잠을 깨울라 숨죽여 꺽꺽 울고 있는 스물 두살의 그녀를 바라보는 지금의 나는 이렇게 묻는다. 왜 너는 너의 젊음과, 너의 에너지와, 너의 아름다움과, 너의 자유와, 너의 건강함을 선명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있냐고. 20년이 넘게 찾지 못했던 그 '삶의 방향성'을 6개월 만에 찾아내야 한다고 작위적인 데드라인을 만들면서 까지 자신을 못살게 구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타박이 아닌 연민의 질문이다. 미래의 불투명함이 시리도록 차가워 지금의 발걸음을 떨리게 하는 이에게 자유는 고독으로, 젊음은 어리숙함으로 보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보면 지금의 고민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거라고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 고민으로 밤을 지새우는 자신을, 외로움에 비틀거리는 자신을, 지금껏 해온 모든 결정에 회의감을 품는 자신을 자책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뉴욕에서의 시간은 터닝 포인트였어요. 뉴욕이라서, 휴학이라서 가 아니라, 고독했기 때문이죠. 여태껏 내 삶을 이끌어주던 사회의 프로그램과 프레임, 이를테면 커리큘럼, 동아리, 아르바이트, 대외활동, 가족과 친구들의 기대에서 벗어나 비로소 나의 하루하루를 직접 프로그래밍 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비틀거리고, 기웃거리고, 두려워하면서 그렇게 고독하게 있다보니 마음 속 소리가 더 잘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낯선듯 익숙한, 호기심과 창조력으로 가득찬 내면의 또 다른 자아가 고개를 들었다고나 할까요. 정말 공부하고 싶은 주제를 찾아 뉴욕의 직장인들과 어깨를 맞대고 수업을 들었고, 길거리에서 다양한 억양과 어휘와 일상의 리듬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며 친구가 되는 법을 배웠고,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역사를 이해하는 법을 배웠죠. 매일이 온전히 생산적이고 배움으로 가득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들은 결국 저에게 방향성을 제공해주었어요."
"그러니 방향감각을 잃었다고 느껴진다면, 더 마음껏 길을 잃어보세요. 더 적극적으로 고독해져보세요. 낯선 곳에 가보고, 생각도 해보지 못한 일을 해보고, 아니면 생각'만' 해오던 일을 해봐도 좋아요. 분명 조급한 마음이 들거에요. 조급한 마음은 더 어렵거나 더 비싼 '프로그램'을 내밀거나 어떤 자격을 위한 준비과정같은 것들을 따르라고 열심히 닦달할거에요. '어학연수를 가봐. 영어는 기본이지' '방황할 바에야 이 자격증이라도 따놔.' 이런 식으로요. 조급한 마음을 쉽사리 떨칠 수는 없을거에요. 그렇지만 조급한 마음이 떠들어대는 닦달에 반응해 따라갈 필요도 없어요. 조급한 마음과 조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배우세요. 그에 휘둘리지 않으며 지내다보면 더 용기있고 호기심 넘치는 마음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을거에요. 그 목소리가 결국 방향의 키를 내어줄거고요."
스물 두살 빈털털이 나는 한참 뉴욕 위 격자를 헤매다 브랜딩 이라는 단어를 우연히 만났다. 덕분에 졸업후 브랜딩 컨설턴트를 첫 직업으로 삼았다. 10년 후 지금의 나는 브랜드 전략가가 아니다. 한국도 뉴욕도 아닌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다. 대학생 시절 찾은 방향은 졸업 후 첫 직장에 닿는 데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 후로 당신은 또 길을 잃을 것이다. 대학생들이 휴학을 하는 것처럼 직장인들은 번아웃을 선언하고 휴직하거나 퇴사를 한다. 이 전공이 정말 나의 진로에 도움이 되는 걸까 고민하는 것처럼, 직장인들도 이 전문분야가 정말 나의 진로에 도움이 되는 걸까, 연차만 쌓이다가 변화를 꾀할 기회를 놓치는 건 아닐까 걱정한다. 조급해 한다. 인생은 어찌보면 끊임없이 길을 잃고 또 그러다가 길을 찾는 과정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꾸 길을 잃고 또 그러다가 어떻게든 찾는 걸 반복하다보니 이제는 알겠다. 길을 잃었다는 감각은 위기상황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삶이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라는 걸. 그래서 나는 대학생, 혹은 사회 초년생인 당신이 지금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에 대한 부담감에서 조금 자유로워지기를 소망한다. 지금의 선택이 인생을 좌지우지 한다고 믿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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