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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신 Scott Park Dec 01. 2020

경마대회를 본다고 공휴일?

멜버른 컵

호주로 직장을 옮긴 첫 해였다. 11월 1일 화요일이었다. 아침부터 회사 동료들이 들뜨고 분주해졌다. 누구는 맥주 몇 박스를 사러 간다고 했다. 누구는 핑거푸드 주문한 것을 확인했다. 남자 동료 한 명은 평소에 입지 않던 정장을 멋있게 빼입었다. 여자 동료 한 명은 책상 옆에 화려한 모자가 놓여있었다. 


옆에 있는 동료에게 물었다. 

"오늘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오늘 멜버른 컵이 있는 날이야"

"멜버른 컵이 뭔데?"

"응, 호주에서 제일 유명한 경마 대회야. 경기가 개최되는 빅토리아 주에서는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어. 시합이 3시에 시작하니까 우리는 2시 반쯤 모두 모여서 파티를 하지"


'경마 대회 때문에 공휴일로 지정했다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동료 직원 중 한 명이 팀 전체 메일로 보낸 것이었다. 자기 자리에 와서 경마 베팅을 하란다. 말의 번호가 적힌 표 한 장에 직원들이 $1 씩 내고 구매하여 실제 경기의 결과에 따라 배당금을 받는 것이었다. 운이 엄청나게 좋으면 10배 또는 100배까지도 벌 수 있단다. 재미로 $5를 내고 티켓 5장을 샀다. 


2시 반쯤 되자 TV가 있는 주변으로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아이스박스에 넘치게 준비해 놓은 맥주 중 한 병을 골라 들거나 와인 한 잔을 손에 들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직원의 경우에는 청량음료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핑거 푸드 중에서 맘에 드는 것으로 한 접시씩 담았다. 한 손에는 음료를, 다른 한 손에는 음식 접시를 들고 서로 담소를 나눴다. 


시계가 3시를 가리키자 TV에서 경기의 출발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 전 직원이 TV의 경마 중계에 빠져들었다. 직원들은 자기가 응원하는 말이 앞서가면 환호성을 지르고 뒤로 처지면 아쉬움의 소리를 냈다. 총거리는 3,200 m 였다. 업치락 뒤치락하면서 경기는 불과 3-4분 만에 끝났다. 자기가 베팅한 말이 우승한 직원들은 활짝 웃었다. 나는 혹시나 했는데 역시 꽝이었다. 


멜버른 컵은 세계에서 가장 우승상금이 많은 '2 mile' 경주이다. 올해의 경우 총 우승상금은 8백만 호주달러였다. 원화로는 약 65억원이었다.   


또 다른 경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옆에 있던 동료에게 다음 경기는 언제 시작하냐고 물었다. 근데 이걸로 끝이란다. '이렇게 허무하다니.'


경마가 끝났지만 직원들은 그대로 남아 서로 담소를 나눴다. 한국에서는 직장에서 회식을 많이 하기 때문에 서로 친해질 기회가 많지만, 호주에서는 회식이 없기 때문에 서로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경마 자체보다도 오히려 이런 친목의 시간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베스트 드레서 선발이 있었다. 멋있게 차려입은 남자 직원 1명, 여자 직원 1명을 골라서 시상식이 있었다. 


멜버른 컵의 슬로건은 'the race that stops the nation' 이다. 말 그대로 호주 전체를 멈추게 만드는 경주이다. 회사 업무는 잠시 중단되더라도 직원 간에 웃고 떠들고 즐기는 소중한 시간이다.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가끔은 이렇게 그 일상을 세우고 주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가지는 게 필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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