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청춘이라 믿던 시절, 나는 습관처럼 이어폰을 끼고 살았다. 군대를 갓 제대하고 복학생으로 불리던 시기였다. 그때는 비어있는 시간에는 늘 무언가를 들었다. 말 그대로 공강 시간, 강의실에서 어디론가 이동할 때, 혼자 밥을 먹을 때, 나무 그늘 아래 잠깐 쉬러 나와 자판기 커피 한잔을 뽑아 담배를 물고 있을 때도,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내가 노래를 즐겨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속에는 동기 부여에 능숙한 교육학 강의 파일과 청년들을 대상으로 사역했던 서울의 유명한 목사의 설교 파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누군가의 임용 합격 수기에 그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도 그렇게 했으니, 나도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여린 믿음이 있었다. 그것을 듣고 있어도 초조함과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듣고 있는 동안 괜찮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계속 귀에 꽂고 있었다.
무의식에 스며들었으면 하고 바랐다. 처음에는 조금 의심이 들긴 했지만, 완전히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하루하루 뚜벅뚜벅 걸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들을 했다. 실제 삶을 살고 있지만, 게임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를테면 롤플레잉 같은 종류의 게임, 나는 그 게임의 성실한 플레이어였고, 나를 승리로 끌어줄 경험치와 아이템을 수집하는 중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실제로 그런 격언들이 때때로 나의 무기가 되고 방패가 되기도 했다. 하루 건너 찔러대는 불안을 물리칠 수 있었고, 그저 널부러져 있고 싶은 마음을 밀어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유독 마음에 드는 말이 있으면 노란 포스트 잇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였다. 전공책 속지 첫번째 장에, 도서관 사물함에, 하숙집 공용 화장실 휴지를 놓는 선반에 붙여 놓았다. 그런 일을 반복하자, 나는 수집한 문장을 어느 정도 믿게 되었다. 덕분에 대부분의 시간에 시계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밝은 곳을 보면 그림자는 등 뒤에 생긴다. 그런데도 어둡고 불안하다면 터널을 지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자. 터널은 최대한 직선으로 가는 지름길이니, 고마워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도 떨린다면 정확한 방향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북쪽을 가리키는 지남철의 끝은 원래 떨리는 법이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겠지. 지금 문뜩 기억나는 것은 대략 이런 문장들이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그런 말을 신봉했다. 의심할 시간도 아까웠다. 마음에 여유가 없었던 것은 나에게는 주어진 환경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본가의 형편을 알고 있었고, 서울에서 공부하는 동생은 학자금 대출받아 고학한다는 것을 알았다. 한 번에 시험에 붙지 못하면 모든 것이 어렵게 된다는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나를 추동할 문장들이 절실했다. 그래서 그런 목소리를 찾아 들었다. 세상에는 그런 격언이 많아서 힘들진 않았다. 나는 그것을 시시때때로 옮겨 적었다.
덕분에 나는 누구보다 제일 먼저 도서관에 도착하는 학부생이었고, 선배들에게 거의 유령 취급 당했던 예비역이었다. 복학하고 2학년부터 나는 도서관에서 거의 살았다. 열람실에 집착하던 자리가 있었다. 환기가 잘되고 다른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였다. 학생이 많아지는 시험기간을 제외하고는 늘 그 자리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매일 매일 열람실이 소등하는 시간까지 그 자리에 지키는 것이 내가 취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성취였다.
열람실 불이 꺼지기 삼분전에는 그날 인풋한 내용을 빈 종이에 아웃풋했다. 빈종이에 그림을 그리듯 뭔가 써낼 수 있는 느낌이 좋았다. 개념도를 그렸다. 가지를 뻗어나가고 정리된 내용이 길게 나올수록 자신감이 생겼다. 그것도 누군가의 합격수기에 읽었던 내용이었다. 그렇게 하면, 그것을 오래도록 지치지 않고 반복하면, 어디에선가 지켜보고 있을 절대자가 알아주지 않을까, 괜찮은 미래에 닿지 않을까 싶었다.
그 이어폰으로 가끔 음악을 듣기도 했다. 학과에서 답사를 다닐 때 그랬다. 주로 오래된 음악들이었다. MP3의 용량이 작았고 음성 파일이 많았기 때문에 노래는 몇 곡 없었다. 주로, 김광석, 유재하, 전람회의 음악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테이프로 즐겨 듣던 것들이었고 군대 시절 경계 근무하며 작은 목소리로 불렀던 것이었다. 나에는 작은 성공이라 여길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 세월도 그렇게 지나서 여기에 있게 되었으니, 이 길에서도 이렇게 견디면 어딘지에 가 닿겠지 싶었다.
종종 혼자서 술을 마실 때도 그것으로 음악을 들었다. 방학이 시작되고 캠퍼스가 조용해지면 이상하게 술을 마시고 싶었다. 사람이 적어서 뭔가 몰두하기에는 더 좋은 환경이었을 텐데, 이상하게 더 쉬고 싶어졌다. 겨울방학의 밤은 전기장판을 틀고 이불 속에 몸을 묻으면 쉽게 잠들었지만, 열대야가 이어지는 여름 방학은 달랐다. 열린 창문으로 매미 소리가 뜨거운 바람과 함께 밀려오고, 옛날 친구들이 그리우면 뭔가 홀린 것처럼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숙했던 집 옥상에는 빨래를 널 수 있는 곳이 있었고, 옆에는 오래된 평상이 있었다. 한낮이 남긴 열감이 있는 그곳에 앉아 있으면, 습하지만 조금은 시원한 듯한 밤공기가 나를 이불처럼 휘감는 것 같았다.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줄에 매달려 흔들리는 빨래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거기서 새로운 것 없는 오래된 노래를 듣고, 담배를 몇 개비를 태우고, 혼자 한병의 술을 비웠다. 그런 일탈을 종종 했다.
하지만, 나는 한 번에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졸업하고 치른 첫 시험의 결과는 고독하게 보냈던 3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공부만 할 수 없어서 잠깐이라도 일하려고 했지만, 경력 없는 지방 사범대학생을 받아주는 곳은 거의 없었다. 공고가 뜨면, 연고가 없어도 지원하러 갔다. 교생 실습 때 입었던 정장을 입고, 새로 산 가죽가방을 들고 뭔가 팔러 다니는 외판원처럼 이 도시 저 도시를 여행 다녔다. 그런 시간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이어폰을 끼고 다녔고, 새로운 수업 파일이나, 설교를 들었다. 공고가 없으면 독서실이나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청춘은 저물어 갔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짧으면 몇 주씩 길게는 몇 달씩 학교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시험 준비를 하며 학교에서 일을 했던 이유는 돈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가 꿈꾸는 자리의 감각을 잃어버리기 싫어서였다. 생생하게 꿈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도 믿었고, 끌어당기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말도 믿었다. 새롭게 알게된 말이었다. 세상에 그런 말은 쉽게 만들어졌고, 넘치도록 흘러다녔다. 나는 그 믿음 또 한동안 물고 늘어졌다. 그럼에도 그 시절 동안 나는 꿈을 꾸기만 했었고 원했던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런 말을 흘려듣게 된 것은 내가 나를 청춘이라 믿지 않았던 시절부터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언어는 공허했고 무의식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몸에 해로운 약처럼 느껴졌다. 자기 개발, 자기 경영 이런 말만 들어도 신물이 나왔다. 내 삶은 창대하게 끝나지 않아도 되니, 이 지난한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진행되길 원했다. 끝이 미약한 것이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느리게 도착해도 되니까. 이 긴 여행이 끝났으면 했다. 그것이 청춘의 끝물에 꾸었던 유일한 꿈이었다.
그렇게 백지에 그렸던 꿈의 가지가 거의 다 잘려 나가고, 거의 기둥만 남았을 무렵이었다. 나는 고향에 내려와 있었고, 늙어가는 도시의 중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기간제도 아니고 수준별 강사 자리였다. 그때는 이제 더 이상 그런 파일을 듣지 않았다. MP3는 한물간 물건이 되었고, 나도 그랬다. 그 무렵부터는 공부하는 시간을 초시계로 기록하지도 않았다.
나는 어느새 꿈을 권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누군가를 평가하는 것도 두려웠다. 나에게 교사가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었다는 것을 청춘이라 믿었던 시절을 통과하면서 배웠다. 그럼에도 모든 터널에 끝이 있는 것처럼 그 시간에도 결국 끝은 있었다. 우연히 닿은 곳이 목적지가 아니어도, 우회해서 도착하더라도, 빛나는 것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두운 것이 있다고 하여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경험했던 청춘은 추종이었고, 꿈을 있는 힘껏 부풀리는 것이었고, 거기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누군가는 그것을 이루지만, 또 누군가는 그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납득하는 시절이었다. 청춘이라 말하고 인생의 봄이라 믿지만, 또 그렇게 봄 같지 않았던 시절을 그렇게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