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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난 May 07. 2022

잊고 있었던 여행의 감각

코로나 이후 여행은 어떤가요


뉴욕에 가면 하루에 3만보를 걷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손에 휴대폰을 쥐고 구글맵의 반짝이는 점을 따라

깔때기가 펼쳐진 쪽이 내가 향하는 쪽이라는 것을 재차 삼차 확인하며 저 블록만 지나면 우회전..아니 좌회전을 하다보면 잊고 있던 여행의 감각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쌀쌀했던 날씨 중간중간 느닷없이 온천지에서 볕이 쏟아졌고 그럴때면 볕의 색깔이 서울과 달라서 볕의 양이 한국과 달라서 기분이 좋았다. 마주친 사람들이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눈웃음을 지어서 좋았다. 속재료를 메뉴에 다 써뒀지만 맛은 잘 연상이 되지 않는 음식을 시키고 POS 터치스크린에 띄워진 Tip 15%, 20%, 30% 중에 15%를 고르고 나서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굿데이!를 외치고 돌아설 때에는 세련된 도시인이 된 거 같아서 으쓱했다. 길거리에서 전력으로 뛰고 있는 사람들과 전력으로 떠들고 있는 사람들, 거대한 개를 끌고 산책하는 사람들 앞에서 개를 보고 미소 지어야 할지 사람을 보고 미소 지어야 할지 고민하다보면 다음 개가 오면 웃음이 났다. 센트럴파크의 잔디는 이불처럼 보드랍고 중간중간 숲이 갑자기 너무나 진지하게 나타나고 옆에는 고운모래의 야구장이 텅 비어있어서 내것도 아니지만 아깝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숙소 근처의 아폴로 극장이라는 곳은 꽤나 유서깊은 무엇이라고 들었는데 마침 도착한 날에는 '아마츄어 나잇'이라는 쇼가 코로나 이후 오랜만에 재개했다는 소식에 줄을 서서 들어갔더니 말 그대로 아마츄어들이 차례로 나와서 장기자랑을 했고 중간중간 프로들의 스탠딩 코미디와 연주가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 태양고 축제에 와있는지 재즈의 메카 할렘에 있는건지 헷갈렸지만 이런 아마츄어의 공연에도 가득찬 객석과 뜨거운 함성소리를 쏟아내는 부자 나라 사람들의 여유에 마음이 넉넉해지기도 했다.


오래된 호텔에서 보는 <슬립 노 모어>는 또 어땠냐면 어디서부터가 컨셉이고 어디까지가 컨셉인지 아득할 정도로

모든 디테일이 컨셉을 향해 꽉 짜여진 와중에 관객에게 이렇게까지 자율성을 주는 대범함에 몇번이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고 매번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고 오싹해했다. 내가 이 극작가라면 나의 천재적임이 너무 뿌듯해서 잠이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모마는 어땠더라. 걸려진 큼직큼직한 그림들의 대부분이 봤던 그림이거나 들어본 작가라서, 와 이거 뭐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가 3차원으로 펼쳐진다면 모마구나야! 했는데 그 와중에 관객수는 DDP에서 했던 살바도르 달리전의 1/100 밖에 되지 않아 와. 뉴요커들의 스노비쉬함은 (윤여정님께 배운 단어) 대단하네 멋지네 했다.


소호는 또 어떤 곳이였냐면, 미국에서 옷 잘입는 사람을 보려면 오스카 시상식이라도 가야되는건가 싶었던 서울쥐의 눈을 확장되게 만든 곳으로서 골목골목 상점 앞마다 말 그대로 시크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길에 늘어져 수다를 떨고 있어서, 와 스타일이 좋다는 것은 군더더기 없는 몸매, 블랙이 적당히 섞인 코디, 그리고 얄쌍한 헤어스타일, 3박자가 떨어져야 되는거구나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는 또 뭘했더라.

그 외 대부분의 시간에는 그냥 불편해했다.


자야 할 시간에 잠이 오지 않아서, 놀아야 할 시간에 놀 것이 너무 많아서, 걸어야 할 시간에 다리가 아파서, 말해야 할 시간에 단어가 생각이 안나서, 쉬어야 할 시간에 마음이 바빠서, 혼자 있어야 할 시간에 친구가 필요해서, 마셔야 할 시간에 빨리 취해버려서, 그래서 많은 시간에 불편해하다가 드디어 알게 되었다.


맞네. 이거네. 여행의 감각.


왜 여행이 그렇게 오고 싶었냐면

재밌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었고, 예쁜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못봤던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었고, 편한 것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긴장되는 것을 경험하고 싶었던 어떤 마음. 권태보다 위험한 것이 궁금해서 내내 그리워했던 어떤 공간. 내 힘과 의지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어서 그냥 받아들어야 하는 어떤 상황. 70%정도만 알아듣는 어떤 대화. 나 혼자만 뚝 떨어져있다는 어떤 감정.


그것을 내내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워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뉴욕에서는 걷고 걷고 걷고 걸으면서 몸 어딘가에 있었던 여행의 감각을 찾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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