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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onghae Lee Nov 10. 2019

07.난 개발이 싫어! 진로의 고민

동아리에 가입하다.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이번엔 대학생활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전문대에 다닐때는 동아리 활동도 못해봐서 아쉬움이 좀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기필코 동아리 생활을 하겠노라 다짐했습니다. 입학 후 한 2주정도가 지나니 각 동아리에서 학생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 한 동아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dblab이란 동아리인데 편입생들만 들어가는 특이한 동아리였습니다. 보통 일학년부터 동아리 생활을 하기 때문에 기존 사람들과 같이 보내기 눈치가 보이기 마련인데 편입생만 받는다니 고민없이 바로 가입을 했습니다. 가입 신청서를 작성하고 선배들과의 만남을.가졌습니다. 비록 이년밖에 할 수 없는 특별한 동아리이니만큼 더 끈끈한 선후배 사이를 자랑한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동아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데이터베이스를 스터디하는 동아리이니만큼 데이터베이스 스터디를 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당시 오라클 8i가 주요 버전이라 이 책을 구입후 공부하기시작했습니다. 각 챕터마다 한사람씩 맡은 후 각 챕터를 담당한 사람이 발표를 하고 질문을 받는 형식이었습니다. 이렇게 스터디를 해나갔습니다. 또한 선배들을 초빙해 IT현장에 대한 조언과 그들이 가진 주무기(기술)에 대해 강의를 들었습니다. 특히 알고리즘에 대해 설명해주시면서 화면으로 보여줄때는 정말 눈이 돌아갈만큼 신기했습니다. 지금은 경력이 쌓여서 그런지 별거 아니지만 그때당시는 정말 존경의 눈빛을 발했습니다. 

또한 저희 랩실은 정말 잼있는 곳이었습니다. 거의 기숙사였습니다. 이불과 밥통이 랩실에 있어서 숙식을 여기서 해결했습니다. 교수님이 쪼금씩 랩실 용돈을 만들어 주셔서 그돈으로 반찬과 쌀을 사서 여기서 해 먹었습니다. 또한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랩실로 와서 스터디를 하고 끝나면 집에 가지 않고 바로 여기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아침 8시 30분쯤 일어나 간단히 세수를 하고 수업에 들어가곤 했습니다. 옷은 늘 트레이닝복이나 반바지등 뭐 거의 노숙자 복장이었습니다.^^. 담당 교수님 수업시간이면 반드시 휴식시간에라도 실습실에 들러 교수님이 수업하시는데 문제가 되지 않도록 컴퓨터도 확인해보고 칠판도 청소하고 했습니다. 이렇게 일년을 보내고 선배님들은 졸업하시고 이제 저희가 신입생을 모집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후배들이 있는 교실에 가서 동아리에 대해 설명하는데 엄청 떨리더군요. 긴장을 타서.그런지 소변도 마렵고.. ㅋ 어찌저찌해서 후배들을 모집하고 선배들에게 배운 방식대로 스터디를 이어갔습니다. 


선배들의 조언, 그리고 진로의 고민 

전 원래 서버나 하드웨어등 인프라 관리를 하고 싶었습니다. 용산에서 일해봐서 그런지 그런것들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제 주위에서는 대부분 개발쪽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웹 개발쪽으로 많이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때당시 웹 개발쪽의 인력이 상당히 부족했고 가장 인기가 많은 분야였기때문에 그쪽으로 준비하는 분들이 대다수였습니다. 그래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맞는것일까.. 인프라를 하고 싶은데.. 신입은 잘 뽑지 않는것 같고.. 개발은 잘 할줄 모르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DB동아리에 들어왔으니 DBA를 해볼까.. 근데 이분야는 신입은 아예 안뽑는것 같던데.. 진짜 내가 갈곳은 용산밖에 없는걸까? 정말 수없이 고민한것 같습니다. 정말 하고싶은것을 못하게 되는 것인지, 반강제로 개발을 해야 한는 것인지 수없이 고민을 했습니다. 네트워크도 쫌 관심이 있어 그쪽도 알아보니 자격증은 기본이고 제가 알던 네트워크 지식은 어디서 써먹지도 못하는 정말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시간만 계속 까먹고 있었습니다. 


재미는 있다. 하지만.. 

4학년 2학기가 끝나갈 무렵 교수님께서 용돈이나 벌라고 학과 홈페이지를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주셨습니다. 간단하게 게시판 몇개하고 그냥 링크 몇개를 이어만드는 홈페이지였습니다. 조건은 특정언어(Java-JSP)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자바의 ‘자’도 알지못하는 저는 급하게 자바책 하나를 도서관에서 대여후 그 책을 이용해서 급하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책을 읽어보니 장난이 아니더군요. was니 아파치니 무슨 웹 어플 얘기를 해대고 알지 못하는 용어로 가득하더군요. 미치는줄 알았습니다. 책은 또 지금 가져와보니 왜 이렇게 두꺼운지, 두꺼우면 뭐 모를때 찾기 좋겠지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니 제 입장에서는 더 않좋은 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아쉽고 급한건 저라 코어 부분은 다 건너뛰고 웹페이지 작성하는 부분만 보았습니다. 소스 부분을 똑같이 따라서 입력하되, 컬럼 및 데이터등은 저의 환경에 맞게 수정해 나같습니다. 클래스, 메소드 개념은 닥치고 그냥 코딩만 죽어라고 했습니다. 그때당시는 구글도 없어서 라이코스, 야후를 죽어라 뒤지며 에러를 해결해 가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에러하나 잡겠다고 하루를 그냥 버린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단순한건데 이게 원리와 기초지식이 없으면 당연히 모를수밖에 없고 안되는게 당연한 것이였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코딩을 하다보니 일단 약속한 날짜 한달전에는 모두 코딩을 마칠수 있었습니다. 오픈 한달전까지 모두 마치고 한달동안 기능검수 및 테스트를 하는게 조건이었습니다. 

교수님에게 가져가서 테스트를 받는게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오류 검수표를 작성하는데 20개가 넘어가더니 교수님께서 다시 해오라고 조용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죄송해서 미치는줄 알았습니다. 다시 랩실로 돌아와서 하나하나 오류를 수정하며 이게 이거구나 저게 저거구나, 이건 왜 이렇게 돌아가는건지 하나하나 차근차근 알게 되는 게기가 되었습니다. 한 이틀밤을 꼬빡새다 도저히 안되겠어서 랩실에서 이불을 피고 잤더니 하루를 내리 잤더군요. 이렇게 수정하면서 4일차때 교수님에게 다시 가지고 검수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이번엔 20개 아래로 줄더군요. ㅋ 교수님께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하시면서 일대일로 알려주시니 너무 고마웠습니다. 이해도 더 잘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육 후 다시 랩실로와서 수정에 수정을 하고, 교수님에게 검사 받고 다시 수정하고 하기를 한 3-4번 반복하니 드디어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 홈페이지를 가지고 학과로 방문하여 검수를 받았지만 결국은 퇴짜를 맞았습니다. 아무리 봐도, 제가 봐도 허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큰 경험을 만들어주신 교수님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또한 수고했다고 용돈까지 챙겨주셔서 눈물이 다 나더군요. 이렇게 처음으로 웹 개발이라는것을 맛만 볼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었습니다. 웹개발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사회로 진출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높은 영역의 DBA 

DB동아리에 가입한만큼 DBA업무를 생각해 보았지만 신입을 DBA로 업무를 주는 회사는 제로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대기업에 입사하면 가능하겠지만 중소기업이나 기타 회사에서 신입을 DBA로 일하게 해주는데는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게 데이터베이스는 기업의 중대한 자산이 모인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신입에게 맡기지 않고 숙련된 기술자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사회탓, 제탓만 하고 있었습니다. 신입을 안뽑는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DB유지보수 및 장애대응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중소기업들이 있었습니다. 여기는 신입도 뽑는곳도 다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채용이 가뭄에 콩나듯 있었기 때문에 채용사이트에서 보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인프라 관리를 꿈꾸다. 

결국은 제가 할수 있는건 인프라 관리였습니다. 어쩔수 없었습니다. 인프라가 재미가 있어서 학교 컴퓨터 유지보수는 제가 거의 다 했습니다. 고스트(이미지 클론 복제 및 복구 전문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학기마다 컴터를 싹 다 초기화시켰으며, 디비 서버 관리도 거의 다 제가 했습니다. 교수님 디비 실습 시간시 오라클 셋팅도 했으며 계정할당 관리등도 다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더 재미가 있다고 느껴지는 저에게 다른 대안은 없었습니다. 그저 인프라관리 및 셋팅 유지보수가 제 천직이라 결정후에는 이것맛 찾아다니고 밀어부쳤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로 졸업이었습니다. 


강제 코스모스 졸업 

제가 졸업할 당시 대부분의 대학교들은 토익 졸업점수를 일정 점수 이상 취득해야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대학교는 토익점수 미취득자에 대한 배려(?)로 영어 교양수업 1,2를 수료하고 졸업작품을 하면 졸업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달리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좋은 회사에 가려면 토익점수는 무조건 필요했습니다. 이기회 아니면 언제 또 공부해 보겠나, 예전 편입 경험을 살려 몇개월을 공부했습니다. 또한 토익은 하나만 하면 되었기에 이걸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아시겠지만 팀단위 작업은 어차피 한사람만 하게 되어있습니다. 누군 준비하구 누군 노는 꼴을 제가 보기가 싫어 토익으로 결정한 것도 이유라면 이유입니다. 여튼 기회는 졸업전 딱 4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좀 하면 되겠지란 안일한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점수가 안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졸업점수는 600점 이상인데 점수가 계속 500대에서 안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죽겠더군요. 그리고 한번의 기회를 남기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영어공부만 했습니다. 그사이 동기들이나 친구들은 하나 둘 교양 수업을 마치고 졸업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만 똥줄이 타고 있었죠. 그리고 마지막 토익점수를 받았을때 심장이 떨리더군요. 이번에 떨어지면 끝이다. 부모님 모습 못본다. 나 졸업한다고 옷까지 맞추셨는데 이거 떨어지면 난 집 못간다. 별생각을 다 하며 오픈을 했습니다. 결국은.. 낙방.. 하늘이 무너지더군요.. 에휴.. 그래도 부모님을 실망시킬수 없다는 생각에 부모님을 모시고 졸업식장에 왔습니다. 당연히 저는 졸업자 명단에 없었습니다..ㅜㅜ 다들 졸업앨범 졸업장등을 가지고 오는데 저만 없었습니다. 설상가상 학과 사무실에 들르니 넌 졸업자가 아니니 학사모를 줄 수없다고 조교님이 말씀하시더군요. 눈물날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돌아서서 가려는 찰나 교수님이 눈치 채시고는 저에게 학사모와 옷을 빌려주셨습니다. 정말 교수님에게 감사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앨범과 졸업장은 우편으로 보내준다고 얘기하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무사히 졸업식을 치를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센스를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래 저래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학교앞의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부모님께 반드시 졸업장을 드리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이렇게 한바탕 졸업식을 치룬 후 한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건 8월에 졸업인데 아직 졸업신분은 아니고.. 그렇다면 단기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습니다. 그래서 미 졸업자의 사회 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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