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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디대디 Dec 05. 2023

잔인한 겨울

패딩 사고 싶다. 

불가항력

: 사람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힘. 


매년 11월 블랙프라이데이를 필두로 시작되는 연말 세일의 향연은 

12월 크리스마스를 정점으로 찍고 끝이 난다. 


11월 중순, 매서운 칼바람이 몰고 온 세일의 파도는 그야말로 불가항력이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물건들에 30% 할인 50% 할인이라는 딱지가 붙고 나면

찬바람과 함께 겨울잠을 잘 준비를 한 듯 꽉 닫힌 내 마음에 그리고 내 지갑이 

마치 마법사가 고절한 수법으로 펼친 마법에 걸린 것처럼 활짝 열리게 된다. 


도대체 나는 왜 이걸 사고 있는 걸까. 싶다가도 

미친듯한 할인율을 보고 있자니, 장바구니에 어느새 다른 물건을 담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연말이면 소소하게 들어오는 보너스가 다 털릴 때까지 계속되는 레이스. 

레이스가 다 끝나고 나면 펼쳐지는 후회의 파라다이스. 


간혹 정말 잘 샀다 싶은 물건이 있기도 하지만, 

한 번 정도 쓰고 난 뒤, 무기한 방치돼버리고 마는 물건들도 있다는 사실에 

현타가 세게 온다.


이번에는 다르리. 

당장 필요도 없는 물건을 다람쥐 마냥 

'싸다'는 이유로 쟁여놓는 

소시민의 삶에서 벗어나겠다. 


역시 물건은 필요할 때 제 값을 주고 사는 게 맞다. 

이번만큼은 눈길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엊그제였는데


이른 한파와 함께, 예상보다 더 일찍 찾아온 그놈의 세일에 

즐겨 찾는 쇼핑몰 앱에서 연일 

- 드르르 드르르 

[ 00시간 무진장 세일 진행 ]

[ 지금 놓치면 후회할 세일 품목을 확인하세요!] 


폰이 한시도 쉬지 않고 울려대는 통에 

못 이기는 척 오늘도 업무시간에 

한 손을 키보드 위에 다른 한 손은 폰을 쥔 채 

- 휙 휙 

네모난 화면의 처음과 끝을 쉴 새 없이 달리고 있는 

나의 두 눈이 원망스럽다. 



유난히 추울 것으로 예상되는 올해 겨울.

내 눈길을 사로잡는 아이템이 있었으니, 바로 

'패딩'이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연말 보너스가 주어지고 

평소에는 꿈도 꾸지 못 할 할인율이 적용된다 한들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일종의 불문율 같은 것이 있기에 

연말에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아이템 또한 

'패딩' 되시겠다. 


[저기 말이야. 이번에 보너스 들어왔잖아.]

[응]

[그.. 패딩 하나 사도 될까? 좀 비싸긴 한데]

[아니]

[네.]


그렇다. 


나름 남 부럽지 않게 벌 만큼 벌고 있고,

결혼 후에 마치 통과의례처럼 남자들에게 

강요되는? 또는 자발적으로 행해지는 '용돈'이라는 게 딱히 없지만

어느새부턴가, 20만 원이 넘어가는 

다시 말해 우리 부부가 생각했을 때 '비싸다'라는 축에 속하는 물건을 사기 전에는 

항상 '그녀'의 허락이 필요하다. 


패딩: 

솜이나 보온재를 넣은 점퍼를 지칭하는 말로, 

한때는 국민 패딩이라고도 불리고, 

등골브레이커라고도 불리던 '노스페이스'사의 '눕시패딩'마저도 

아무리 할인을 해봐야 20만 원에서 30만 원 사이에 구매가능하다. 


물론, 요즘은 유니클로 같은 SPA 브랜드에서도 패딩이 아주 잘 나오긴 한다. 

근데 참 공교롭게도, 실제로 매장에 가서 입어보면 뭔가 2% 아니, 좋게 말해 2%지 

내 기준에서 봤을 때에는 딱 '그돈씨' 정도. 


그렇다고 가격도 마냥 싼 것이 아닌 게, 할인이 전혀 적용되지 않을 경우에는 

보통의 경우 SPA브랜드에서 산다고 해도 10만 원은 대부분 넘는다.


아무래도 보온성이 기본으로 요구되기 때문에 사용되는 덕이나 구스 같은 보온재가 사용되며

보온재가 겉감을 통해 밖으로 삐져나오지 않기 위해 사용되는 특수한 섬유와 봉제기법 등이 

필요한 패딩의 특성상 마냥 '싸게'만들기가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 거기에 남들보다 예쁘고 특이한 패턴이 얹어져 있다면 

가격은 배로 뛰는 웃픈 현실. )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왕 살 거면 비싸더라도 오래 입을 수 있고 

가볍도 따듯한, 품질 좋은 '패딩'에 눈이 가게 된다. 


사실 비루하지만? 나름 없을 게 없는 내 옷장에 

'다운'으로도 불리는 이 옷이 없는 것은 아니다. 


때는 바야흐로 7년 전. 

아직은 아들이 이 세상에 없을 무렵. 


6년 연애기간 내내 커플티 조차 하지 않았던 우리 구 커플 현 부부가, 

난생처음으로 커플 패딩을 맞춘 그날도 이렇게 추웠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마침 옷장에 없던 아이템인 패딩이 사고 싶어 졌던 나는 

연말 보너스를 핑계 삼아 아내를 꼬드겨 백화점으로 향했다. 


어렸을 적부터 입고 싶었던 '노스페이스' 패딩이 한 벌 가지고 싶었던 나.

당연하게도 아내를 데리고 '노스페이스'매장을 가장 먼저 찾았건만. 

힙하고 트렌디한 무드를 내는 눕시 패딩보다는 편안하고 잔잔하며 깔끔한 패딩을 찾던 아내에게 

'눕시'패딩을 반려당하고 나서 찾게 된 '파타고니아'매장.


그리고 그곳에서  무려 방한, 방풍 그리고 기본적인 방수까지 다 되는 만능 파카를 

높은 할인율로 (지금에서야 알았지만, 정말 잘 나가는 상품은 할인을 잘 안 한다는..)

구매할 수 있었다. 그것도 두벌이나. 

결국 그 해 연말 보너스는 사악한 가격으로 유명한 '파타고니아'에서 모두 소진해 버렸다. 


가격은 사악했지만, 역시 보너스는 '탕진'하는 재미가 있고,

새 옷이라 그런지 돌아가는 길,

우리 부부의 몸을 데워주는 '파타고니아' 파카가 전해준 따듯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잘 샀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주 잠시. 


바로 그 해, 아내가 돌연 도저히 못 입겠다며 항복? 선언을 한 뒤 

결국 본인의 입맛에 맞는 다름 패딩을 사 입고 오기 전까지 말이다. 

(여담으로 자기는 맘에 들지 않았는데 그냥 나에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o.k. 하신 거라는.. 

아니 그럴 거면 그냥 한 벌만 사지 그랬..)


뭐, 이차저차 해서 커플패딩으로 샀던 그 파카를 결국에는 내가 돌아가면서 입게 되었는데

그게 지금으로부터 벌써 7년이 지난 일이다. 


아무튼, 여전히 겨울만 되면 나를 지켜주는 '파타고니아' 패딩은 

그동안 관리가 소홀했던 탓인지 예전만큼의 보온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단단한 재질의 외피에, 깔깔이처럼 얇은 패딩의 내피를 결합하여 입는 방식인 이 '파카'의 

현재 유일한 장점은 단단한 외피 덕에 주변에 날카로운 것이 있다 한들 

아무런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뿐. 


추운 겨울, 

가벼운 반팔 티 하나만 걸치고 거의 맨살과 같은 상태에서 

맨몸에 감기는 나일론 특유의 감촉을 느끼면서 

마치 침낭과 내가 하나가 되어 다니는 듯한 그런 기분 따위는 

느낄 수 없는 

그런 파카일 뿐이다. 


아. 

두툼한 패딩이 사고 싶다.


필파워 900짜리 두툼한 패딩으로 다가 

내 몸을 휘감고 싶다. 


밀려오는 한기에 

오늘도 내복 위에 티셔츠 

티셔츠 위에 플리스 

플리스 위에 파카를 걸친 

양파 같은 나. 


[그.. 패딩 하나 사도 될까? 좀 비싸긴 한데]

[아니]

[네.]


자기는 좋은 거 하나 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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