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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못미 Aug 13. 2018

우리에겐 단지 선택지가 없었을 뿐

이승연, <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

국가가 자살한다.

올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명 대일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출산율 관련 기사의 댓글창에서는 각자가 바라본 한국 현실에 대한 성토가 이어진다. 꼰대들이 단물 다 빨아먹고 사다리는 걷어차버린 헬조선이 문제다, 무슨 소리냐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생각하는 나약한 요즘 것들의 정신상태가 문제다. 간혹 정책적인 측면에서의 지적도 눈에 들어온다. 육아수당, 육아휴직, 국공립 어린이집, 신혼부부 주거지원 등의 키워드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파편적이고 불충분한 대답들이지만 최소한 그 목소리들은 일정한 방향을 향해 정렬해있다. 그건 바로 "한국에서 살기 힘들다"는 것. 적어도 이 한 문장만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집, 차, 혼수, 결혼식 비용 등을 부담해가며 가족을 만들고, 한 명 온전히 키우는 데 4억이 든다는 아이씩이나 낳을 리가 없다. 게다가 한국에서의 가족제도는 특별히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가족>에서는 한국의 압축 성장을 가족 제도가 어떻게 서포트 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구의 근대화는 약 200년 정도의 기간에 걸쳐 진행됐고, 그 기간동안 터져나오는 사회적 갈등을 제도적으로 보완해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한국인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사회 안전망이다. 반면 한국은 그 기간이 50년에 불과하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를 충분히 인지하고 사회적으로 공론화 시키기까지의 물리적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물론 애초에 "잘 살아 보세"라는 시대적 구호와 독재 정권은 그런 목소리들을 허용하지 않았다.


불만들은 외화되지 못했다.

모순은 그대로 관습으로 누적되었고 하나의 시스템으로 굳어졌다. 그것은 어쩌면 '과잉핵가족주의'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마땅히 공공 영역이 기능했어야 할 부분마저 가족의 책임으로 전가된 형태였다. 일본의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저성장 시대에 가족안전망이 사회안전망을 그나마 대체하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하지만 그건 거꾸로 가족시스템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승인하면서 국가가 가족에게 사회적 책임을 전가한 상태이기도 하다. 결국 가족 바깥에는 아무런 안전망이 없으므로 어떻게든 가족이라는 중력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가족 의존적인 개인이 생산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가족의 기능이 비대해질 수록 개인의 존재감은 축소된다.

결혼은 가문의 결합으로 뭉뚱그려지고, 출산은 생산주의적 인구론으로 뭉뚱그려진다. 아이는 개인이라기 보다는 부모의 소유물이 되고 생존주의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독립적 개체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다. 이렇게 막대한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가족을 꾸리는 데는 당연히 그만큼의 비용이 든다. 그리고 사회는 그 비용을 모두 당사자(혹은 가족)가 부담하도록 한다. 하지만 내가 왜? 개인의 입장에서는 무엇을 위하여 가족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지 기성세대의 당위만으로는 그저 모호하다. 꾸짖고 외면하고 싶겠지만 이 '모호한 감각'이 오늘의 진실이다. 그래서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등 책임질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윤리적 포기'를 결심하는 사람들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꾸짖고 외면하고 싶겠지만 이 '윤리적 포기'가 오늘의 진실이다.


진정 무엇이 이들을 포기하게 만드는가.

<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의 저자는 이렇게 대답하는 듯 하다.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선택이 실종됐기 때문에." 근대적 결혼의 본질은 두 성인의 결합에 있다. 결코 가문의 결합이나 부모가 '자식을 다 키웠다'는 대리만족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우선순위가 있어서는 안된다. 당사자가 행복할 수 없는 전근대적인 발상이다. '동등한 두 개인이 동거를 위하여 계약을 맺는 것'이라는, 그 새삼스러운 본질을 바로 '팍스(PACS)'가 한국 사회에 일깨워 줄 수 있다.


'팍스'란 프랑스 가족제도의 한 형태다.

동성혼이 혼인관계로 인정 받지 못하고 있던 시기 과도기적으로 도입됐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의 불완전성이 혼인 제도에 상상력을 불어 넣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사는게 결혼 아닌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이 파괴되지 않아도 되는 사회. 계약서에 조항을 서로 알아서 정하고 한 쪽이 거부하는 순간 파기되는 그런 제도라면 가능하다. '동등한 두 개인이 동거를 위해 계약을 맺는 것'이라는 본질이 되살아난 것이다. 곽민해 에디터님은 이 책의 편집 후기에서 "'이런 결혼이라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고 적고 있다. 개인의 입장에서 '선택해볼 만한 선택지'를 늘려 숨통을 틔워주는 것.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선택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추구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국가에게는 이를 마땅히 책임질 의무가 있다.


변화해야 한다.

그 변화에는 '선택해볼 만한 선택지'를 확보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사회적 편견의 해소 또한 포함된다. 한국 사회는 유독 정상성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 '정상'을 누가 정했는가는 언제나 의심스러운 것이지만, 규정의 문제를 떠나서 생각해본다. 이 사회의 대부분이 그 '정상'을 준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제인가, 아니면 '정상'의 기준이 문제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정상성 이데올로기를 벗어던지기엔 무섭고 두렵다. 그렇기에 한국 사회에는 더 많은 바깥의 사례가 필요하다. 팍스는 과감히 '결혼' 바깥에도 사랑은 있다고 말한다. 동거도 사랑이고, 동성애도 사랑이다. 팍스는 바깥의 사랑들을 위한 사랑의 재발명이다. 사랑의 새로운 이름이다.


P.S : 일부러 팍스 이후의 이혼율, 출산율을 적지 않았다. 중요한 건 개인이 개인으로서 행복해지는 것이지, '출산율을 올리려면 팍스를 해야 한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먼저고, 숫자는 그 다음이다. 통계가 굳이 궁금하다면 위키피디아에서 '시민연대계약'으로 검색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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