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규, <사라진 독자를 찾아서>
#1. 얼마 전 넷플릭스를 유료결제 했다. 이것저것 들춰보다 보니 뜻밖에 재밌는 것들을 몇 개 찾았다. 몇 개 꼽아보자면 하나는 '블랙미러'(단편소설을 영상화 한 느낌이다. 한 블로그 이웃분께서는 블랙미러를 보시고 한국 단편소설 이제 다 망했다는 평을 남기셨다), 또 '위 약관에 동의합니다' 같은 긴 호흡의 다큐멘터리, 아니면 '라이프' 같은 한국 드라마도 재밌다.
그 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건 미국의 미디어 Vox와 넷플릭스 합작의 '익스플레인: 세계를 해설하다' 시리즈다. 매주 수요일마다 일부일처제, 케이팝, 암호화폐, 여성의 오르가즘 등 다양한 주제를 15분 내로 경쾌한 리듬으로 담아낸다. 물론 깊이도 동시에 챙긴다. 이런 콘텐츠는 어느 날 뚝딱 나오지 않았다. 이미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익스플레인 시리즈를 제작해온 이력이 있었고 그 무대를 넷플릭스로 옮겼을 뿐이다. Vox가 특별한게 아니다. Buzzfeed도 넷플릭스에서 '팔로우 어스 : 지금 우리 세계'라는 콘텐츠를 서비스 중이고, 그 밖에 Axios, Wasington Post 같은 언론사도 유튜브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내 언론사 중에 이런 콘텐츠에 도전해볼 만한 곳이 있을까? 아, 그냥 떠올려만 봤다. 지금도, 앞으로도 없을 거 같아서다. 첫 번째 이유는 레거시 미디어에서는 아직도 지면이 위, 디지털을 아래로 보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꾸준한 투자를 통해 노하우를 쌓을 축적의 시간을 감내할만한 의지를 가진 곳이 없기 때문이다. 벌써 고용형태가 죄다 비정규직이니 뭐.
#2. 어제는 한 음악 평론가의 워크숍에 다녀왔다. 첫 시간이었던 만큼 오늘날 음악 평론가의 현실, 민낯은 어떠한가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하겠지만 음반 시장과 미디어가 변화하면서 음악 평론을 읽는 사람이 예전만큼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시장에서 유통되는 평론의 형태와 역할도 달라졌다. 예컨대 언론사나 잡지 지면에 칼럼 형태로 기고하거나, 모바일 환경에서 제공하기 좋도록 한줄평, 한 두문단 정도로 짧아진 형태로 음원사이트에서 제공되는 경우. 이 경우 고료는 지급되겠지만 앨범 단위로 충분한 깊이를 전달하는 기획은 포기해야 한다.
과거에는 몇몇 외국 매체 기사들을 한글로 옮겨 적고 새로운 음악들을 소개하는 작업만으로도 평론 취급 받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인터넷과 번역 기술의 발달로 일반인들도 외신을 접하는데 무리가 없다. 음악 추천도 Top 100차트, 음원 사이트 등에서 공유되는 플레이리스트, 감상 이력에 기반한 알고리즘 추천 등 다양하다. 음악의 테크닉적인 수준까지 내려가 음악가가 직접 해설해주는 유튜브 콘텐츠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 시대에 평론은 뭘 해야 할까. 별점도 크게 의미가 없는 세상에서 누가 읽는다고? 평론은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어, 근데 다 쓰고 보니 이거 언론사가 얘기하는 '진짜 저널리즘' 얘기네?
#3. <사라진 독자를 찾아서>에서 이성규씨는 대부분의 뉴스가 'News', 즉 속보성을 잃는 순간 가치를 상실하는 속성상 애초에 좋은 상품이 될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철저히 서비스가 되어야 한다고, 아니 뉴스는 처음부터 서비스 였단다. 맞는 말이다. 공급자가 아닌 소비자 입장에서 수용하기 쉬운 형태, '대중'이 아니라 개개인, 혹은 버티컬한 취향 단위에 소구하는 콘텐츠를 기획하고 그것을 비즈니스 모델과 연결시키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생각해보자. 사라진 것은 독자가 아니다. 대중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언제나 거기에 서서, 때로는 인쇄물을, 때로는 PC를, 때로는 모바일을, 때로는 오디오 인터페이스를 사용해 소식들을 만날 뿐. 사라졌다는 표현은 언론사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오고 가는 풍경 속에 저널리즘은 어떻게 몸을 섞어 넣을 것인가. 콘텐츠 서비스들의 치열한 틈바구니 경쟁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저널리즘의 본질이 '전문성'이 아니라 '생산 관행'에 있다는 점, 그래서 기자 조직에게 변화란 말 그대로 고통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지만. 변하는 풍경과 독자들의 마음을 훈장질 하고 탓할 수만은 없는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민 없이 언제나 민주주의나 공익 등의 이유로 다른 콘텐츠들이 줄을 늘어섰을 때 새치기 프리패스를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정치적 무관심'이라든가, '변절'이라든가, '타협'이라든가, '독자들의 리터러시 문제'라든가, 여하간 '진정한 저널리즘' 구현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나열한다 해도 말이다. (독자들을 비난할거면 그들이 읽을 거리를 만드는 당신들은 뭐가 되는건데?)
물론 기성 언론사 조직들이 무능하다거나 경쟁력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오히려 이미 대단히 강력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 당시 페이스북 피드가 어땠었나? 기억나는 뉴미디어 매체 하나만 떠올려보자. 죄다 TV조선, JTBC, 한겨레 등 레거시 미디어가 차지하고 있었다. 뉴미디어 매체가 기억이 날 리가 없는 것이다. 결국 의제를 선점하고 특종을 캐내는 능력은 기성 미디어의 취재력에 있다. 다만 그것을 지금 변화한 환경에 맞게 가공하는 등 진짜 뭔가를 해보겠다는 것에 대해 의사결정자 차원에서의 의지가 안보인다는 것이 문제처럼 보인다.
#4. 그래서 당장은 저널리즘에 대한 논의들이 독자의 소비 환경에 맞는 접근을 고민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최근 읽은 '퍼블리'의 박소령 대표 인터뷰가 그래서 인상 깊었다.
“웹에서 볼 수 있는 콘텐츠 대부분은 URL 하나로 신문 쪼가리처럼 흩뿌려져 있어서 상품성이 없어요. 상품성을 갖기 위해서는 콘텐츠만큼 그릇도 중요합니다. 음식을 만드는 팀은 콘텐츠팀, 그릇을 만드는 팀은 제품팀이에요. 음식과 그릇이 둘 다 완결성이 있어야 상품 가치가 있죠. 음식은 좋은데 그릇이 허접하면 돈을 안 냅니다. 대부분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라는 그릇에 의존하는데, 상품성 측면에서 완결성이 떨어집니다.”
과연 어떤 언론사가 가장 먼저 디지털 환경에 맞는 음식과 그릇을 모두 잡아낼 수 있을까? 그 음식과 그릇이 만족할만한 수준에 올라 설 때까지 충분히 투자할 수 있을까? 조회수 기반 광고나 네이티브 애드를 넘어서는 수익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비즈니스 마인드와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뉴미디어 스타트업이 등장할 수 있을까? 콘텐츠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저임금 고강도 단순 노동에 소모되지 않으면서도 멋지고 좋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구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밑빠진 독의 밑을 어떻게 하면 채워넣을 수 있을까?
#5. 사실 내가 아무리 저널리즘이나 뉴미디어 전반에 대한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다고 해도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레거시 미디어는 틀렸어, 뉴미디어는 답이 없어, 이런 의미 없는 선문답의 양극단만을 계속해서 왕복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어디까지나 나는 외부인이다. 현업에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압력이나 실제 저널리즘 조직의 민낯은 또 다른 결을 띠고 있을 것이다. 그래, 다들 알아서 열심히 잘 하고 있겠지.
그러나 자꾸 뭔가 부족하고 아쉽다는 감각이 남는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뭔가 지금과는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현실에 대한 물음표가 충분히 충분했는지 자문하게 된다. 그러나 이 물음표는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다. 적어도 한국에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레거시 미디어도, 뉴미디어 스타트업도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냥 잘 모르겠다. 특히 요즘은. 뭘 하고 싶고, 어디서 뭘 만들고 싶은지. 좀 더 스스로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저널리즘도 모르겠는데 거기에 테크놀로지까지. 책을 펼쳐 들면서는 조금 알 것만 같았는데, 정작 책을 닫고 글을 적기 시작하자 다시 미궁으로 빠져버렸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정리가 아니라 질문 뿐이라는 것만 봐도. 그래도 좋은 착점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그걸로 위안 삼아 본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축적의 시간을 견뎌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