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못미 Dec 28. 2018

위상이형(位相異型)의 섬

"마침내 우리의 위상(位相)은 이형(異型)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했지만, 내게 사람 속이라는 것은 천 길 만 길 낭떠러지였다. 타인과의 교류란 언제나 아득했다. 꾸밈없이 마음을 내주어도 되돌아오는 건 그저 ‘야호’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던 내 마음의 메아리뿐이었다.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유리벽 너머에 가 닿는 데 성공하는 일은 없었다. 풀 수 없는 문제들의 막연함 앞에서 나는 왼쪽으로 내달렸다. 왼쪽으로 내달리는 동시에 오른쪽으로도 내달렸다. 타인의 마음은 왼쪽에도 있고 오른쪽에도 있었다. 내 시선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타인이 있었다. 어디에나 있다는 건 사실 어디에도 없는 것과 같았다. 어디에나 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다는 마음의 모순은 공허했고, 그 공허 속에서 나는 서서히 야위어갔다. 외로움은 뼈마디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나의 일부가 되었다.


타인들은 흡음판처럼 다가왔다. 좀처럼 되받아쳐지지 않는 나의 절망을 흡수하며 그들은 심지어 무럭무럭 자라는 듯 보였다. 이제는 정글처럼 우거진 타인들이 햇빛을 막아 그늘을 드리웠다. 그 속에서 나는 하루하루 말라죽어갔다. 그늘은 깊고 깊어서 언제나 밤이고 언제나 밤이었다. 이파리를 바스락대며 저들끼리 웅성대는 소리는 쉴 새 없이 바람에 실려 왔다. 끝없는 밤, 끝없는 잠을 뒤척이며 이불에서 바스락 소리를 내본다. 서걱서걱. 어쩌면 이것이 비슷한 소리겠거니 위안 삼는다. 잠을 자도 자도 밤은 끝나지 않았고, 창밖에 불어대는 바스락 소리를 뒤쫓으며 이불로 두텁게 감은 몸을 이리저리 꼼지락 댈 뿐이었다. 바람은 내 귓가를 지나 바쁘게 제 갈 곳을 향해 이리저리 불었다.


마음을 돌보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소통의 장애를 겪는 이의 마음은 언제나 고되고 가난했다. 홀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댔다. 마을에는 왕래하는 상인이 없었으므로 홀로 실을 뽑고, 바늘을 이리저리 꿰어, 옷을 지어 입었다. 날이 심하게 가물거나 홍수로 밭이 쓸려내려 갈 때면 꼼짝없이 배를 주려야 했으나 그래도 삶은 그럭저럭 이어졌다. 궁핍을 부끄럽게 여겨 이리저리 감추더라도 마음의 가난은 벌써 눈빛 깊은 곳부터 들어앉아 말보다 더 많은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혐오하다가, 혐오하다가, 마침내는 끌어 안아버리고 말았다. 이것도 운명이려니 생각하며 황폐하고 푸석한 땅에 다시 한 번 쟁기를 휘두르고 휘둘렀다. 우울 깊은 곳에 바가지를 내려 한 접시 떠 담았다. 머리맡에 자리끼를 가져다 놓고는 끝나지 않는 어둠 속에 고된 몸을 누인다. 어째선지 자꾸만 목이 타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미리 놓아둔 우울을 조금씩 홀짝였다.


이곳은 벗어날 수 없는 나의 마을, 나의 세계다. 사람과 사랑을 찾아 걷고 또 걸으면 동그랗게 돌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따름이다. 너의 이름을 부르면, 너의 대답이 들려온다. 사실 너의 대답이길 바란 나의 대답이 메아리쳐 돌아왔을 뿐이다. 왜소한 나의 지구를 동그랗고 동그랗게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을 나의 대답인 것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나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의 흔적만을 발견한다. 내 잘못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껍데기를 쓰고 웃음을 주고 받는 동안에도 나는 그 속에서 너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다시는 너를 찾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사실의 사실은 너를 찾고 있는 내가 너에게서 버려진 것일 지라도. 단지 사실의 사실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하고 좋겠다고, 그렇게 멋대로 믿어버리면 그만 아니던가. 내가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너의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만 있으면 모든 일이 충분했던 것이 아니었나.


이곳은 낭떠러지고, 타인은 언제나 천 길 만 길 깊이로 무너져 내린 공허였다. 어둑한 공허 속에서 나는 꿈을 꾸었고, 바라는 것을 보았고, 그 속에서 너를 보았다. 밤은 끝없이 이어졌다. 좀처럼 잠들지 못한 나는 이불을 뒤척여 너를 닮은 바스락 소리를 내었다. 맞이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아침엔 손잡이 달린 머그컵 안에 담긴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초콜릿이 서툴게 발라진 도넛이 식사로 차려질 예정이었다. 너의 마을에는 책이나, 이가 나간 밥공기 따위의 것들이 있겠거니 하고 상상했다. 나의 심장에는 구멍이 하나 뚫려있고, 너의 가슴에는 구멍이 없었다. 어라, 누가 메웠나 생각하다가 갑작스레 울컥 솟아오른 눈물을 삼켰다. 그늘이 우거진 숲이 펼쳐진 섬의 조그만 구멍 속에 나는 살고 있고, 그곳에 너는 없다. 마침내 우리의 위상(位相)은 이형(異型)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멈춘 '차트' 속 잠든 너를 찾아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