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졸리 Jun 20. 2021

청각장애인은 교사가 될 수 없어.

국립 교대의 중증장애인 입학 거부 사태를 보고

 2021년 4월 한 국립 교대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중증 장애인의 입학을 거부하기 위해 임의로 입시 성적을 조작하고, 불합격을 지시하라는 내용을 양심적인 누군가가 내부 고발하였으며 이에 장애계에서 적잖이 작지 않은 큰 분노를 안겨다 주며 악의적 장애인 차별임을 확신하였다.


 점수 조작을 지시한 입학관리팀장은 “(중증장애인은) 학부모 상담도 안 될뿐더러 학급 관리도 안 된다. 그건 안되지”라며 “기본적으로 이런 애들은 특수학교 교사가 돼야지, 왜 초등학교 교사가 되려고 그러겠어? 특수교사가 싫다는 거잖아, 자기도 장애인이면서”라고 표현하거나, “날려야 한다”며 “내가 작은 일반 대학이라면 신경도 안 쓰겠는데, 장애 2급이 네 아이 선생이라고 생각해봐, 제대로 되겠나”라는 장애인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에이블 뉴스)


 안타깝고 허탈한 심정으로 기사 내용을 정독한 나는 청각장애인인 딸이 교사가 되길 바랐던 부모님은 국립 교대 중증장애인 입학 거부 및 차별 사태를 보고 무슨 심경이 드실까?라는 생각이 꼬리 물고 늘어졌다. 바야흐로 약 14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장애인을 가족으로 둔 가족은 진로에 대한 고민에 관자놀이를 연신 눌렀던 때다. 그 당시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직업이 극소수였기에 고민은 더욱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청각장애인은 교사가 될 수 없어.' 


 전라남도 여수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나의 생각은 정말 그랬다. 이 글을 읽기 전에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은 편협한 편견이 절대 아님을 분명히 말한다. 여수에 학창 시절을 보낸 나는 주변에 청각장애인을 전혀 본 적이 없을뿐더러, 다양한 직종,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청각장애인의 사례를 한 번도 본 적 없었고, 진로를 상담하는 시기에 고 3 담임교사는 나에게 진로에 관하여 아무런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그만큼 장애인 진로 정보가 없었고 가능성을 일말도 제공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담임교사가 조금이라도 제공해줬더라면 나의 미래는 달라졌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학창 시절의 나는 머리가 비상하고 영민한 사람이 아니었다. 공부하는 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반복 공부하는 노력파였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친구들과 공유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소외된 친구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나에게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청인에 비해 공부 조건이 더 열악해서 독학을 주로 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나만의 공부법도 터득했다. 


 모든 과정과 결과를 지켜본 부모님은 내가 교사에 적합하다고 판단하셨고 교사가 되기를 바라셨다. 부모님께서는 학생생활기록부 장래희망에 매년마다 '교사'라고 기재했지만, 슬슬 진로를 정해야 할 시기인 고등학교 때 부모님과 미래, 진로에 대해 진지하고 깊은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관자놀이를 연신 눌러가며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거듭하고 거듭했다. 정말 하루라도 고민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1차적으로 장애인으로서 무슨 직업을 가지고 혼자 자립해서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며 일할 수 있을까? 며칠 고민을 거듭했지만 2차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진로 및 직업 정보의 심각한 부재로 인해 부모님과 나는 '청각장애인은 교사가 될 수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차선책으로 공부하고 싶었던 의류 관련 직종으로 대학을 진학하기를 선택했다. 그렇게 나는 4년제 대학 의류 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 


 의류 디자인학과에 입학하게 되면서 나는 전라남도 여수에서 경기도 용인시로 상경하게 되었다. 좁디좁은 여수에서 벗어나 활짝 드넓은 세상으로 첫발을 내린 셈이다. 대학교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청각장애인들을 접하고 하나둘씩 인연을 맺고, 건너 건너 청각장애인들이 생각보다 다양한 직종과 직업을 가지고 있고 전향도 한 청각장애인들을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청각장애인 교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일말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아예 배제한 것이다. 한 번쯤 생각해볼 법한데 당사자인 내가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지 못하니 당연히 그들도 못하거니 라고 생각했다. 청인들에게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여러 가능성을 널리 열려두면서 청인이니까 당연히 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나와 같은 동종인 청각장애인들에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아무것도 몰랐던 우물 안 개구리였다. 정보의 부재, 무지함으로 인하여 무의식 중에 동종을 차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부끄럽지 않다. 나의 무지함을 스스로 깨달았고 받아들이고 고쳤다. 무의식 중에 동종을 차별했던 나를 반성하고 성찰함을 통해 지금은 꿈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각장애학생에게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공부하고 싶은 것 뭐든지 해보라고 격려하고 있다. 결코 그들의 꿈을 막지 않으려고 한다.


청각장애인도 교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늦게 알았다. 


 패션 회사에 근무하던 당시, 회사와 별개로 외부 활동하면서 내가 속하는 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나는 전시회 작가로 참여하였고, 특수교사로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사회적 기업 대표를 맡은 청각장애인을 오프닝 때 만났다. 소개를 하고 대화를 나누다가 특수교사로 일한 적 있다는 그의 말에 겉으로 티 냈지 않았지만 속으로 '어? 청각장애인이 교사를 한다고? 어떻게?' 하며 많이 놀랐고 충격을 받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물음표를 가득 안고 그를 붙잡고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공적인 자리에서 그럴 수가 없어 물음표를 간신히 삼키고 전시회를 진행하는 데에 집중했다. 결국 그를 붙잡고 물어보지 못했지만 그와의 만남은 꿈을 포기했던 내 마음을 연신 두드렸고 점차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현재가 더 중요하고, 패션 쪽으로 가리라 굳게 마음먹었던 나는 요동치는 내 마음의 작은 파동을 외면하고 패션회사에 계속 일했다. 


 내가 외면했던 작은 파동은 점차 큰 파동으로 돌아왔고 직장생활과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출근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때 주변 사람들에게도 말 안 했지만 몇 개월간이 고통과 눈물의 연속이었다. 평생 몸 묶여 회사에 뼈 묻힐 생각 하자니 우울증과 같은 증상이 나에게 보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매일 밤마다 침대에서 꺼이꺼이 우는 언니의 모습을 지켜봐 온 친동생은 가족에게 SOS를 쳤고 가족에게 선택지가 주어졌다.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청각장애인에게 약한 생각하지 말고 계속 회사를 다니라고 다그칠 것인가, 회사를 때려치우고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응원해줄 것인가.


 가족은 회사를 때려치우고 꿈을 응원해야겠다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나는 비로소야 우울증에서 해방되어 지금 교사로 일하고 있다.


 14년 전에는 사회적 장애와 정보의 부재 때문에 청각장애인은 교사가 될 수 없다고 믿었던 시절을 지나 현재는 청각장애인은 모든 직업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나와 다르게 장애가 있어도 자신의 꿈을 위해 불가능해 보이는 영역에 도전하고자 할 때 입학관리 팀장이 가지고 있는 편견과 차별로 인하여 도전은 염두도 못 내고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어떻게 보면 장애인이 꿈을 이루기 어려운 열악한 황무지 환경이다. 복잡한 절차, 사회적 장애, 정보의 부재, 누군가의 편견과 차별 등이 만연해있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이 기회를 박탈당하고 꿈을 포기하며 살아왔을지 가늠이 안된다. 그 국립 교대의 입학관리 팀장 같은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하지만 나는 청각장애인은 모든 직업인이 될 수 있고,
모든 장애인도 모든 직업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작가의 이전글 청각장애 교사와 발달장애 학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