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서 탈출하는 법
해마다 11월이 되면 직장인들에게 어김없이 돌아오는 것이 있다. 바로 내년도 경영계획을 짜는 것이다. A팀에서 경영계획 작성을 담당하고 있는 김과장은 누구보다도 바쁜 11월을 보내는 중이다. 그는 올해 예상 매출액과 경상 이익을 기초로 내년도 경영계획 초안을 작성하여 팀장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임원 달성을 목전에 둔 팀장은 김과장이 제출한 경영계획 숫자에 만족할 수 없었다. 자신이 내년도에 임원 승진 대상에 들어가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경영계획 목표치를 높게 잡아 경영진으로부터 눈도장을 받아야만 했다. 김과장에 불만이 생긴 팀장. 그는 김과장을 불러 질책하기 시작한다.
“김과장! 왜 우리 팀 내년도 경상이익이 이것밖에 안 나오나?”
“팀장님! 올해 우리의 누적 판매량은 연말 추산 대략 1만대입니다. 내년도에도 대당 유통마진이 올해와 거의 같거나 약간 오른다고 가정하고, 내년도 누적 판매량은 올해보다 20% 증가한 1만 2천대로 가정한다면 내년도 이익은 이정도가 나옵니다.”
“김과장! 우리 팀은 이제 막 신규 사업을 시작한지 2년 밖에 안됐어. 내년도 경상 이익을 이것밖에 못한다고 하면, 회사에서는 우리 팀이 하는 사업에 대하여 철수를 명할지도 몰라. 그러니 판매량은 올해보다 30% 이상 올리고 대당 유통마진도 올해보다 10% 이상 올려. 그러다가 내년 상반기 지나서 수정 보고를 하면 되잖아. 그래야지 내년 경영계획이 통과되고 우리 팀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제가 팀장님께서 우려하시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대당 유통마진을 올리려면 그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내년 경기가 호전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근거를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근거는 적당히 원재료 구매 단가 인하나 판매 단가 인상으로 올려서 보고해. 그러면 본부장님도 그냥 넘어가실 거야. 만일 수정하라고 하면 그 때 수정하자고”
팀장의 무리한 강요에 김과장은 어쩔 수 없이 대당 유통마진을 금년대비 10%나 올리고 판매량도 30%나 올려 잡아 보고서를 작성했다. 며칠 뒤 본부장 앞에 경영계획 발표를 하게 된 김과장. 잔뜩 긴장한 그는 본부장의 눈빛과 얼굴 표정 하나하나를 신경 쓰면서 말했다.
제출 서류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발표를 듣던 본부장은 자신의 직감으로 A팀의 경영계획 숫자가 틀린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질문을 시작한다.
“김과장! 내년도 A팀의 경상이익이 어떻게 이렇게 높게 나오지? 대당 유통마진이 왜 이렇게 올해와 달리 높게 나와?”
“그건 베트남 지역에서 구매하는 원재료의 단가가 올해보다 낮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년 경기가 올해보다 나아진대? 김과장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보나? 어느 국제 컨설팅 자료를 인용한 거야? 아니면, 신문 기사라도 있나?”
본부장의 굵고 힘이 실린 목소리에 김과장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리고 팀장을 쳐다봤다. 하지만 팀장님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말씀도 안하신다. 김과장은 당황했다. 경영계획 숫자는 자신이 아닌 팀장의 일방적인 지시로 짜 맞춘 것인데……. 이럴 때 김과장은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
하나로 합쳐진 나라가 다시 세 개로 갈라졌던 후삼국시대. 국력이 쇠락한 신라와 달리 새로 떠오른 후고구려와 후백제는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 혼란의 시대는 영웅을 만든다. 당시 후삼국이라는 혼란기는 왕건이라는 명장을 만들었다. 그는 싸우는 족족 전쟁에서 승리했기에 후고구려의 왕 궁예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하루는 왕건이 전장에서 승리한 후 후고구려의 도성에 돌아와 궁예를 알현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왕건 앞에는 궁예의 싸늘한 시선이 놓여 있었다. 궁예는 왕건이 역모를 꾸몄다고 의심하면서, 자신은 관심법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니 왕건에게 역모 사실을 이실직고하라고 다그친다. 이야기를 들은 왕건은 억울했다. 전장에서 싸움밖에 모르는 장수한테 역모란 웬 말인가? 왕건은 마음속으로 강하게 부인하며,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였다. 이때 장주 최응이 왕건의 옆에 다가와 역모를 꾸민 사실이 있다고 거짓으로 고하라고 힌트를 준다. 왕건의 최응의 안내대로 역모를 꾸미었다고 거짓 자백한다. 이 말을 들은 궁예는 껄껄껄 웃으며 왕건을 용서하며 별도의 상품을 하사하였다. 이 이야기는 고려사 세가 제1 태조 편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하루는 궁예가 태조를 대궐 안으로 급히 불렀다. 그 때에 궁에는 처형한 사람들로부터 몰수한 금은보물과 가재도구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는 성난 눈으로 한참이나 태조를 바라보고 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그대가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음모한 것은 웬일인가?” 하였다.
태조는 얼굴빛을 조금도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궁예는 또 말하기를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능히 관심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안다. 나는 지금 곧 입정을 하여 보고 나서 그 일을 이야기하겠다.” 하고는 곧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이나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그 때에 장주 최응이 옆에 있다가 짐짓 붓을 떨어뜨리고는 뜰로 내려가 그것을 줍는 척하고 태조의 곁으로 달음질하여 지나가면서 귓속말로 “왕의 말대로 복종하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하였다.
태조는 그제야 깨닫고 “사실은 제가 모반하였으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궁예는 껄껄 웃고 나서 “그대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라고 하면서 곧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굴레를 주었다. 궁예는 또 말하기를 "그대는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고 하였다
위 이야기는 드라마 왕건에도 나왔는데, 김과장은 드라마에서 왕건이 궁예에 무릎 꿇고 빌었던 장면을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그래. 지금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은 본부장님의 의심만 살 뿐이다. 차라리 잘못했다 라고 하고 비는 것이 낫다.’
“본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내년도 실적에 욕심이 있어서 근거 자료도 없이 무리하게 매출액과 경상이익을 부풀려 잡았습니다. 경영계획을 다시 작성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본부장은 크게 웃었다.
“허허 김과장! 솔직해서 좋구먼. 암 그래야지. 어떻게 나를 속일 수가 있겠어. 내 이번에는 용서하지만 다음에 그러면 안 된다.” 라고 말하며 쿨하게 회의를 끝냈다.
그리고 주변 임원들에게 오히려 김과장을 칭찬했다. “김과장은 사람이 됐어. 내가 매의 눈으로 보고서상의 틀린 점을 지적하니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더라고. 요즘은 다 자신을 방어하는데 급급한데, 김과장은 그렇지 않더라고. 정말 진국이야.”
살다보면 누구나 억울한 일을 겪는다. 자신의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뒤집어쓰는 경우도 있다. 물론 적극적 방어가 필요하다. 하지만 항상 방어가 최고라고 할 수는 없다. 위의 경우 김 과장이 팀장의 지시라고 변명을 했더라도 결국 그 질책은 김과장한테 돌아왔을 것이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자신이 직접 매를 맞는 게 낫다. 위 사례에서 김과장은 타인의 잘못을 자기 것으로 돌림으로써 전화위복이 되었다. 세상일은 앞날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가 없다. 정말 깊고 오묘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