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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병우 Feb 12. 2019

14. 트레킹 둘째 날

히말라야 여신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2/11 트레킹 둘째 날이 밝았다. 침낭 속에서 뭉개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 일출시간을 확인했더니 6시 50분이 일출이었는데 그만 놓쳐 버렸다. 간밤에도 다이아목스 때문에 화장실을 2번이나 갔다. 화장실에 가려면 옷을 챙겨 입고 다시 벗는 귀찮은 과정이 필요하다. 파쉬 물주머니를 썼더니 침낭 속은 더워서 내복을 벗고 침낭을 1/3쯤 열어야 편안했다.

아침에 첵아웃하면서 보니 방값은 300루피(3천 원 수준)이지만 저녁 피자 780루피, 스프라이트 250루피, 아침 세트 600루피, 끓인 물 2l 200루피, WiFi 200루피까지 다 따로 받아서 총액 2330루피다. 이 동네 물가에 비하면 많이 비싼 편이다. 하루 3000루피로 예상했으니 이 정도는 예산 범위 이내다.

아침밥을 먹고 짐을 챙겨서 나오니 8시를 훌쩍 넘겼다. 체크포인트까지의 거리는 불과 몇백 미터밖에 안되길래 우습게 봤는데, 돌아올 일이 걱정되는 엄청난 내리막 계단이다. 체크포인트에 가서 ABC 가려고 한다고 얘기하니까 체크포인트 지킴이 아저씨가 한 마디 하신다. “정히 가겠다고 하면 가이드는 같이 못 보내니까 당신 혼자나 가라. 눈이 엄청나게 많이 와서 산비탈에 쌓여있는데, 언제 눈사태로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 눈사태가 아니더라도 만약 미끄러운 곳에서 실수로 미끄러지면 계곡으로 빠질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들은 모르니 실종자 수색도 안 할 거다. 내일쯤 위원회에서 등산로를 다시 개방할지 어떨지를 회의해서 결정할 거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갈 강심장이 있을까 모르겠다.


아무튼 길이 열리려면 최소한 이틀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다. 체크포인트를 뒤로 하고 돌아서니 어젯저녁 카톡으로 얘기했던 네히트 회원 만백붓님을 만났다. 이 용감한 젊은이는 하루 더 기다렸다가 내일 아침에 출발하겠다고 한다. 내려온 길을 돌아 다시 올라가려니 또 죽을 맛이다. 일단 롯지로 돌아왔다.

롯지에 도착해서 생각해 보니 아침에 파쉬 물주머니를 안 비운 게 생각났다. 방에서 나오면서 확인했으니 방에 두고 온 것은 분명 아닌데, 그렇다면 침낭 속에 넣고 같이 싸버렸던 걸까? 어쩐지 침낭 부피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또 짐을 다시 풀고 침낭을 열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속에 파쉬 물주머니가 떡 하니 들어 있었다. 족히 2kg은 되는 무게를 모한에게 지고 가게 시킬 뻔했다. 이틀째 짐을 2번씩 다시 싼다. 늙은이들이란..

모한과 몇 가지 대안을 검토했다. 1안) Australian Camp를 향해 Landruk으로 간다. 2안) Poon Hill을 향해 Tadapani로 간다. 3안) Poon Hill을 향해 Ghandruk으로 우회한다.

1안)은 ABC를 다녀온 후에 가기로 한 곳인데 지금 바로 가면 너무 싱겁게 트레킹이 끝날 거 같다. Poon Hill은 체력을 감안해서 포기했던 곳이니 이 참에 가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한이 Tadapani-Ghorepani 구간이 눈으로 막혔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하루쯤 늦게 가는 게 안전할 거 같다고 한다. 그래서 3안)으로 결정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어제 죽을 둥 살 둥 기어올라온 길을 거꾸로 내려가니까 어제보다는 조금 쉬웠다. 하지만 내리막이라 무릎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심조심 내려오다 보니 시간은 올라갈 때나 별 차이가 없다. Jhinu Danda에 오니 11시 반이 되어 점심을 먹기로 했다. 첫날부터 역류성 식도염 증세로 식도가 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뭘 먹을까 고민하는 데 눈앞에 신라면 봉지가 보였다. ‘신라면에 계란 탁’을 주문했다. 속이 풀리는 느낌이다.


계곡의 걸린 철다리를 다시 건너고, 자연과 하나 되었던 나의 영역도 지나고, 어지러움에 비틀거리건 고갯길도 지나서 어제 트레킹을 시작한 Matkyu에 도착했다. 쉬면서 민트 티 한잔을 마신 후 티하우스 맞은편 언덕 위에 꽤 규모가 있어 보이는 마을이 보이길래 저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저기가 오늘 갈 Ghandruk이란다. 헐~ 이거 또 죽었네..

Matkyu에서 Ghandruk은 또 Chhomrong 높이만큼 다시 올라가는 계단길이다. 2번째로 죽을힘을 다해서 오른다. 배낭 무게의 80%를 허리띠가 잡아줘야 하는데 길이가 안 맞는지 어깨에 무게가 실린다. 쉬면서 어깨가 아파서 어깨를 두드리고 있으니 모한이 어설픈 한국말로 “배낭이 무거우면 내일부터는 여기에 더 넣으시오.”하며 자기 배낭을 가리킨다. 이미 계약서에 있는 8kg을 넘겼는데.. 타이거 스텝과 레스트 스텝으로 가다 쉬기를 거듭하며 가까스로 Ghandruk Village Eco Lodge에 도착했다.


롯지에 도착하니 여기도 Chhomrong Excellent View Top Lodge 못지않은 절경이다. 롯지 방에는 샤워실가 있는 화장실이 있고, 뜨거운 물도 나오고, 무엇보다도 방 창문 앞에 설산이 펼쳐져 있다. 일단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고산병 예방에는 체온 유지가 중요해서 절대 샤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여기는 해발 2000m라서 아직 고산병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샤워하는 중에 얼굴에서 살이 떨리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손 저림 같은 것은 다이아목스 부작용이라던데..


엇그제부터 시작된 역류성 식도염 증상이 작열했다. 마치 위산에 식도가 타는 듯 느낌이 들었다. 서울에서 준비해 온 제산제가 1포 밖에 안 남았는데 걱정이다. 이게 단순히 소화력이 약해진 탓인지 팔팔정이나 아세타졸아마이드 부작용인지 알 수가 없다. 오늘은 아세타졸아마이드는 빼고 팔팔정만 먹고 증산에 개선이 있는지 보기로 했다. 만약 이 상태가 계속되면 하산 결정을 해야 할 수준의 고통이다. 내일 아침에 동네 약방에 가서 약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첫날 Chhomrong에 가면서 ABC 가는 길이 막혔다고 할 때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가 내 체력이 준비 안된 것을 눈치채고 날 살려주려고 미리 눈을 뿌려 못 오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리해서 갔더라면 보험료 혜택을 보면서 헬기로 하산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포도라고 생각했던 Poon Hill이 주 목적지가 되고 ABC가 신포도로 전락했다.


이곳 Ghandruk의 롯지가 너무 마음에 든다. 경치도 좋고, 음식도 맛있고, 화장실도 방안에 있고, 게다가 뜨거운 물도 나오니 천국이 따로 없다. 침구도 깨끗해서 침낭은 꺼내지도 않고 침대에서 그냥 자기로 했다. 날진 1l 물통에 뜨거운 물을 채우고 붙이는 핫팩을 목덜미와 배에 하나씩 붙이고 이불속에 들어갔다. 이불속에서 생각해 보니 계획이 바뀌어서 갈아입을 옷도 마땅치 않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발밑에 당나귀 똥만 보면서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일은 이 집에서 하루 더 놀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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