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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병우 Feb 19. 2019

18. 트레킹 여섯째 날

또 날씨가 협조를 안 했다.

2/15 오늘은 Poon Hill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4시 반에 일어났다. Poon Hill 갈 때 복장이 고민이었다. 해뜨기 전에 헤드랜턴을 비추며 가야 하는 새벽 트레킹이라 그동안 낮에 입던 가을 등산복으로는 추울 것 같았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 거금을 투자해서 산 언더아머 콜드기어 상하 내복을 속에 입은 위에 가을 등산복을 입고 출발해서, 올라간 후에는 경량 패딩 입을 수 있게 준비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좋았다. 적절하게 체온 유지가 잘 돼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가끔씩 속을 썩이던 중국산 싸구려 헤드랜턴도 큰 탈 없이 발 앞을 비춰주는 속에서 스패츠, 아이젠을 착용하고 천천히 올라갔다. 역시 해발 3000m의 고산지대라서 호흡이 힘들었지만 역시 나만의 페이스로 차근차근 올라갔다. 1시간 반이 꼬박 걸렸지만 남들보다 일찍 출발한 덕택으로 일출 시간에 늦지는 않았다.


ABC를 포기하고 선택한 Poon Hill인데 이번에도 또 날씨가 협조를 안 했다. Chhomrong까지 갔다가 멀리 돌아서 Poon Hill로 왔건만 날이 흐려서 떠오르는 해나 황금빛으로 물드는 산도 보지 못했다. 그 대신에 지금까지 트레킹 하는 동안에 보이지 않던 Dhaulagiri 1, 2, 3, 4 등의 Dhaulagiri ‘형제봉’들과 Dampus Pass, Dampus Peak, Annapurna 주봉 등등이 그동안 눈에 익은 안나푸르나 남봉, 히운출리, 강가푸르나, 안나푸르나 3봉, 마차푸차레와 함께 네팔 서부의 큰 산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올라갈 때는 1시간 반이 걸렸지만 내려가는 데는 1시간 만에 내려왔다. 롯지에 도착해서 토스트 2쪽, 계란 2개, 밀크 커피로 아침식사를 마쳤다. 아침밥 먹는 동안 잠시 인터넷 되면서 싱글톤 홍사장에게서 이번 학기 강의계획서를 내 대신 올려줬다는 카톡을 받았다. 이래저래 민폐만 끼치는 꼴이다.


방에 올라와 출발 준비를 위해서 짐 싸는데 동작을 빨리 할 수가 없다. 그동안 매일 아침 하던 짐 싸기인데 오늘은 숨이 차서 헐떡거리다 보니 시간이 2배로 걸린다. 1시간이 걸려서 겨우 짐을 싸고 예정 시간보다 30분 늦은 9시 반이 돼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계속되는 내리막이라서 일단 등산 스탁의 길이를 130cm로 길게 늘였다. 내리막길이라서 힘은 많이 들지 않지만 무릎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속도는 여전히 거북이걸음이다. 고도가 낮아지면서 호흡도 점점 편안해진다.


점심시간이 또 애매해서 Nage Thanty에서는 차만 한잔 마시고, Ban Thanty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Ban Thanty가 여기에도 있지만 지난번 Tadapani에서 Ghorepani 가는 길에도 Ban Thanty가 있었기에 모한에게 Ban Thanty에 무슨 뜻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래쪽 숲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Deurali도 여러 군데 있는데 전망 좋은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Danda라는 지명은 언덕이라는 뜻이라고도 했다.


점심식사가 늦어지면서 점점 힘들어진다. 특히 왼쪽 무릎이 쌀짝 아프다고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거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데 Ban Thanty에 도착했다. 그때 시간이 1시가 조금 넘었다. 점심식사로 민트 티와 모모를 주문했다. 그런데 주문받은 처자가 화분 앞에 가더니 뭔가를 손에 한 움큼 쥐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텃밭에서 민트를 따서 그것으로 즉석으로 차를 끓이는 것이었다.


우리 집 화분에도 민트를 한번 심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농사에는 별로 소질이 없는 것 같다. 트레킹 출발 전에는 동양란에 꽃을 피워 보겠다고 멀쩡하던 난을 베란다에 내놓았다가 얼려 죽였다. 몇 해 전에는 바질 모종을 사서 심어봤지만 겨우 한번 수확하고는 다 말라죽었다. 우리 딸이 자주 가는 카페 앞 화분에 바질이 숲을 이룰 정도로 울창하길래 카페 주인아저씨에게 비결을 물었더니, 그저 자기는 물만 좀 줬을 뿐이라던데..


야외 테이블에 앉아 민트 티를 마시고 있는데 하늘이 잔뜩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한다. 서둘러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모모는 네팔식 만두다. 만드는 과정이 궁금해서 부엌에 들어가 봤다. 먼저 눈에 띈 것은 부엌 선반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그릇들의 정돈된 모습이었다. 야채볶음 비슷한 것으로 소로 만들더니, 밀가루 반죽부터 시작한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맛없으면 화가 날 것 같은 순간 그 처자가 군만두처럼 기름에 살짝 튀긴 모모를 들고 왔다. 시장이 반찬이라더니.. 과연 눈이 번쩍 떠지는 맛이다.


맛있는 모모로 점식식사를 마치고 출발하려는데, 제법 빗줄기가 굵어져서 배낭 속에 고이 간직해온 고어텍스 재킷을 꺼내 입었다. 오빠 환갑이라고 동생이 히말라야 갈 때 장비 사는데 보태라며 준 돈으로 산 것이다. 이것 역시 오늘 첫 실전 투입하는 장비다. 그러고 보니 이번 트레킹을 위해서 새로 산 것만 해도 비용이 100만 원이 넘었다. 우리 딸 표현으로는 ‘개오바’라나..


Ban Thanty를 출발해서 내려가는데 한국인 부부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올라왔다. 오늘이 트레킹 첫날이라서 그렇겠지만 빗방울이 굵어지는 와중에 산을 올라가는 아줌마의 화장이 도시 수준이다. 이 산속에서도 아름다움은 포기 못하는 것이 여자인 모양이다.


3시 반쯤 Ulleri에 도착해서 가장 가까운 롯지를 찾아들어갔다. 일단 물티슈 3장으로 세수에서 샤워까지 마쳤다. 평소 그다지 깔끔 떠는 성격은 아니지만 간드룩 도착한 날 머리를 감고 4일째 머리를 안 감았더니 비니를 벗을 때마다 비듬이 눈송이처럼 날린다.


옷을 갈아입고 방앞 의자에서 난간에 발을 걸치고 앉았다.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더니 또 장맛비가 되어 퍼붓는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바로 코 앞의 건너편 산이 구름과 빗줄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번개가 번쩍할 때 하나, 둘, 셋 하고 세어보니 불과 1km 근방에서 번개가 계속 친다. 그러기를 한 시간여 계속하고 있으니 내일 이 산길을 지프가 갈 수 있으려나 걱정되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롯지 도착이 늦었더라면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될 뻔한 것을 면한 것이 다행이었다.


뜨거운 물을 받으려면 비를 맞고 부엌으로 가야 하는데 내가 주저하고 있었더니, 그걸 본 롯지의 네팔 아줌마가 비를 맞으며 보온병을 들고 와서 나에게 뜨거운 물을 부어주고 갔다. 그 덕에 오늘도 누룽지에 갓뚜기 사골우거지를 한 그릇 해치웠다.


Ulleri 롯지에는 전기도 끊겨서 깜깜한 방에서 나와 불기운도 없는 롯지 식당에 앉아 식사시간을 기다리려니 옆 테이블에 할머니 둘이서 Rum주 한 병을 까고 있었다. 할머니 둘이 깜깜한데 촛불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주고받길래 슬그머니 나가서 롯지 주인한테 양초를 하나 구해서 촛불을 켜들고 들어갔다. 나의 작업 스킬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양초가 하나뿐이어서 자연스럽게 합석하게 되어 함께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통성명하고 나는 지난달에 60이 돼서 내가 나에게 생일선물로 트레킹을 왔다고 했더니, June은 자기는 은퇴한 70대 할머니이고 Anne은 자기 남편이 60이라고 했다. June과 Anne은 둘이 친구란다. 나더러 Rum Coke을 한잔 하겠냐고 하길래 술 안 먹는다고 했다. 사실 완전히 술을 안 먹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나이가 들어서 인지 술을 조금만 마셔도 오한이 나서 술이 별로 안 당긴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June이 정색을 하면서 민감한 질문을 해도 되겠냐며 나를 긴장시키더니 북한의 김정은이 어떻게 할 거 같냐고 얘기를 꺼냈다. 이런 질문을 민감하다고 생각하는 배경을 잘 이해 못하겠다. 아마도 북한과 남한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김정은의 말도 안 되는 행태를 우리가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라는 배경이 깔려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래서 남북 간에는 70년 전에 서로에게 가족이 희생되는 잔인한 내전이 있었고, 그 후로 학교에서 서로를 적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서로 말도 않고 지내서 잘 모른다고 얼버무렸다. 마침 아스펜 최사장이 누군가에게서 같은 질문을 받고 받아쳤다는 얘기가 생각나서, 나도 물어볼 게 있는데 “당신들은 Brexit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라고 했더니, 과연 두 사람이 배꼽을 쥐며 깔깔거리고 뒤집어졌다.


내가 주머니 속의 핫팩을 꺼내서 만져 보라니까 Anne은 이게 뭣에 쓰는 물건인고 하는 표정으로 잡지도 못하고 쭈뼛거렸다. 핫팩을 덥석 쥔 June의 눈이 똥그래지며 세상에 이런 게 다 있느냐며 따뜻하다고 좋아했다. 나는 이제 곧 트레킹이 끝나니까 짐도 덜 겸 남아있는 핫팩을 가져다가 그 자리에서 등짝에 하나씩 붙여줬다. 잠시 후 핫팩이 따뜻해 지니까 아줌마 할머니들은 이걸 붙이고 자면 다시 태어나는 기분일 것 같다며 좋아했다.


전기는 들어왔지만 인터넷은 여전히 안된다. 인터넷이 안되니 정말 할 일이 없다. 기억이 가물가물할 때는 즉시 인터넷을 검색하고, 날씨에 따라 다음 날을 대비하는 등 인터넷에 많은 것을 의존한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을 어떻게 살아왔나 싶다. 그만큼 우리는 인터넷에 중독되어 있나 보다.


천둥 번개는 잦아들었지만 밤늦도록 여전히 비는 계속 쏟아졌다. 오전에는 맑다가 오후 늦게부터 비가 오는 것이 이 동네 날씨의 특징인 모양이다. 내일 아침이면 또 그치겠지만, 만약 이렇게 계속 비가 오면 Australian Camp도 생략하고 Pokhara로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해발 2000m 수준으로 내려왔으니 이제는 고산병 예방약도 필요 없다.


오늘 밤에는 화장실을 안 가고 푹 잘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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