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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OURUSGROUP Dec 21. 2020

쓰고 싶은 말이 있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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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다. 군인이었던 나는 행정실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를 딸각거리고 있었다. 단편소설 문학상 접수가 며칠 남지 않았을 때다. 몇 십 번이나 읽어서 외우다시피 한 결말 부분을 마지막으로 읽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쓴 글은 형편없었다. 내 소설에는 부자연스러운 것 투성이였다. 인물들은 툭하면 작위적인 행동을 했고, 소설 배경에는 고증 오류가 산더미 같았다. 혼자 결정하지 못해서 주변 동료들의 의견을 모은 소설 제목마저 끔찍했다. 이런 소설을 심사위원이 끝까지 읽어 보기는 할까 싶었다. 3개월 밤을 군대 컴퓨터를 두드려 찍어낸 내 인생 첫 소설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들이 못났다고 부모로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듯이, 완성도에서 나오는 만족스러움과는 별개로 나는 내 소설을 좋아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당연한 소리인가 하겠지만 여기엔 나름 복잡한 사정이 있다.

나는 항상 듣는 쪽이었다. 친구, 가족, 애인 누구와 있던 남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곤 했다. 경청을 더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사실 난 내 이야기에 대한 남들의 반응이 두려웠다. 아무리 재밌는 에피소드라도 내 조악한 말솜씨를 통해 전해지면 웃음 요소들이 죄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내 이야기를 남이 듣고 싶어 할까 하는 회의가 항상 저변에 깔려 있었다. 나는 듣고 싶어서 듣는 게 아니라, 말하지 못해 듣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알다시피 소설은 쓰는 순간만큼은 단방향 의사소통이다. 독자에게 아직 전달되지 않은 내 문장들은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필요하다면 아예 글을 통째로 엎어 없던 일로 해버릴 수도 있다. 남이 내 이야기에 대해 내리는 평가도 비웃음도 없다. 작가의 작업 책상에는 하고 싶은 말을 담담히 적는 작가와, 그것들을 아무 불평 없이 받아들이는 종이가 전부다. 이러한 특징들 덕분에, 글쓰기는 소심한 나에게 탈출구가 되어 주었다.

추가로 많은 독서량도 영향을 끼쳤다. 부대 도서관에 널린 게 책이었고 나는 꽤 자주 들락거리는 편이었다. 머리에 넣는 양의 십 분의 일 정도는 쓸 만한 씨앗으로 남았기에, 나만의 창작 활동을 시작해서 경작을 해보고 싶은 욕구도 자연스레 생겼던 것 같다. 더 많은 책을 읽어갈수록, 나만의 것을 써보고 싶은 생각도 점점 커져갔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그 당시 나는 뭔가를 쓰고 싶은 욕구가 흘러 넘쳤다는 것이다. 군대의 꽉 막힌 의사소통 방식과 10년 전에나 썼을 법한 일 처리 방식을 보고 있자니, 현실을 바꾸고 싶다는 갈증이 생긴 게 가장 큰 원인이다. 살면서 그렇게 간절하게 내가 처한 상황을 바꾸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염원에 가까운 그 열망은, 머리속에 구름처럼 떠다니던 생각들을 펜 끝으로 전달하는 데 중요한 촉매가 되었다. 또한 ‘한 사람의 노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면, 그 노력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내 소설 주제의 뿌리가 되었다.

요약하자면, 평소에 말하지(쓰지) 못했던 사람에게 쓸 기회와, 쓸 내용 그리고 도움이 될 씨앗까지 풍부했기 때문에, 엉망진창이지만 내가 처음으로 써낸 소설을 나는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다행인 건, 내 소설을 맘에 들어 하는 사람이 있기는 했다. 심사위원들은 내 끔찍한 소설이 나름 마음에 들었는지, 3개월 후 시상식에 간 나는 최우수상 상패를 들고 육군 소장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시상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던 나에게 무엇을 얻었느냐고 누군가가 물었다면, 복학 후 한 학기 등록금을 충당한 상금을 벌었다며 좋아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되돌아보면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쓰고 싶은 것이 있는 삶의 소중함이다. 군인 시절에 다시 조명을 비춰 보면, 내 생활에는 어딘가 결핍이 있었다. 원하는 것을 마음 놓고 요구하지 못했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억울함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비효율적인 시스템 안에서 개인의 의견은 배제된 채 부품으로서 사용되었다.

그래서 바꾸고 싶었다. 처음에는 구덩이 안에서 빠져나가려고만 했지만, 언젠가부터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가까운 이들을 챙겼다. 최대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생활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끝까지 나를 잃지 않으면서 현실과 맞부딪혔다. 내가 쓴 소설은 어찌 보면 그 일련의 과정의 부산물이었다. 내가 현실에서 끝내 바꾸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소설 속의 정수들이 되어 문장 곳곳에 혈흔처럼 남았다. 또한 변화를 갈구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곧 내 모습이었다. 한때 나도 소설 속 주인공처럼 치열한 삶을 살았다는,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증거였다.

인생은 대체로 ‘어쩌다 보니’ 그렇게 흘러간다는데, 요즘 내 삶이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다시글을 써 보려고 한다. 내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다면 글 또한 멋지게 쓰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 덕이다. 다시 한번 쓰고 싶은 말들이 샘솟는 순간을 꿈꾸며, 이곳에 마침표를 찍는다.


황재현

자다가 가끔 깨면 글을 씁니다. 쉬운 글, 어려운 글 다 쓰지만 그 능률은 바닥을 기기에 영감이 올 때 꼭 펜을 잡아야 합니다. 쓴 소설이 운 좋게 문학상을 받아서 현재 한국문인협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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