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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OURUSGROUP Nov 10. 2020

Absence of blank

공백의 부제

2001년 영화인 ‘봄날은 간다’를 최근에 보았는데,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장면이 있었다. 바로 인물들이 핸드폰을 보는 장면이다. 주조연들은 물론이고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들마저 아무도 핸드폰을 본 적이 없었다.


안테나를 뽑아 쓰는 벽돌처럼 생긴 휴대전화를 몇 번 사용하기는 했지만 아무도 그 이상한 물건에 시선을 고정하고 걸어 다니진 않았다. 코로나 이전엔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었던 것처럼, 모두가 스마트폰 없이 살던 때가 있었구나 싶었다. 그 시절엔 불편해서 어떻게 살았을까 싶지만, 생각해보니 내게도 간헐적인 정보 단식 기간은 있었다.

영화 ‘봄날은 간다’

작년 이맘때쯤 육군 병장이었던 난 종종 당직 근무를 했다. 당직병은 밤새 불 켜진 행정실에 홀로 앉아 있어야 했다. 문제는 잠은 쏟아지는데 할 게 딱히 없었다는 것이다. 행정용 컴퓨터는 군 인트라넷만 접속이 가능해 웹서핑은 불가능했다.


당연히 근무 중 스마트폰 사용도 금지였다. 이렇게 완벽하게 온라인과 차단되어 홀로 있는 시간이 나에게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주어지고는 했다. 내가 이 하룻밤을 지새우는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었다.

1. 몰래 잔다.       2. 생각한다.
3. 책을 읽는다.   4. 글을 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건 2번이었다. 책상에 엎드려 졸다가 일어났는데 딱히 책을 읽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을 때 나는 온갖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때 했던 생각들은 시간이 지나고 나니 무엇인가가 되었다. 오늘 있던 일, 내일 할 일, 부대 사람들 과의 인간관계 고민은 일기가 되어 종이 위에 적혔다. 학업과 미래에 대한 고민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의 이정표가 되었다. 갇혀 있는 답답함과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열망은 나중에 내가 쓴 소설 안에 담겼다.


모순적이다. 무엇 하나 새로이 보거나 들을 것 없이 혼자 있을 때 내 자아가 더 확장된 느낌이 들었다. 당시에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미디어와 매체에서 스스로를 격리한 시간은 나에게 다양한 기회를 주었다. 다른 사람이 만든 콘텐츠들을 떠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함으로 스스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또 그날 하루 보고 들은 것을 본인의 방식대로 소화하고 고찰하여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연마할 시간도 제공해 주었다. 평소에 무작위 상태로 쌓여 있는 내면의 생각 구름을 쓸 수 있는 형태로 실체화할 좋은 공방이었다. 올해 2월부터는 사용할 수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전역 후 다시 평소의 바쁜 일상으로 돌아오자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정보의 공백은 사라졌다. 가끔 그때 기분을 내 보려 핸드폰을 끄고 노트 한 장만 펼친 채 책상에 앉고는 하지만 역시 예전만큼 집중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문득 느꼈다.


현대인들에게 부족한 가장 큰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공백이라고 말하고 싶다.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일상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공백이 전부 매워져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한시도 알람과 메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게 완벽한 정보의 차단은 어렵고, 새롭게 생산되고 동시에 소비되는 콘텐츠의 폭포 속에서 개인이 스스로에게 집중할 기회는 항상 부족하다. 사람들이 조금은 의식적으로 디지털 기기와 거리를 두어서 생활 곳곳에 공백을 만든다면 좀 더 여유롭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개개인의 정체성은 남들이 만든 콘텐츠의 바다를 유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혼자가 된 공백에서 비롯하기에,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핸드폰 전원을 꺼 놓고 한 줄을 더 써내려 간다.



황재현

자다가 가끔 깨면 글을 씁니다. 쉬운 글, 어려운 글 다 쓰지만 그 능률은 바닥을 기기에 영감이 올 때 꼭 펜을 잡아야 합니다. 쓴 소설이 운 좋게 문학상을 받아서 현재 한국문인협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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