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하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표현이다. 태어나서 우리는 가장 먼저 우는 것으로 낯선 이들에게 표현을 했다.
수술실의 밝은 빛 아래 낯선 존재들을 처음으로 목격한 두려움 때문일까. 아니면 자궁이 좋았던가 싫었는데 갑자기 밖으로 나와서 그런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궁으로부터 세상으로 나온 순간, 우리는 우는 소리를 통해 인생의 첫 번째 표현을 한다.
이후 배가 고프다고 덥다고 기저귀 갈아달라고 부모에게 우는 행위로써 계속 표현을 한다. 시간이 지나면 '언어'라는 도구를 학습하게 된다.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로 연습을 하다가 결국 의도하지 않은 감동을 부모에게 선물한다. 어눌하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엄마'와 '아빠'라는 소리로.
누군가 '표현'이라는 것이 뭔가요 물어본다면 이상한 눈빛으로 보며 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걸 왜 물어보는 거야?
상대가 누구나 알 법한 어떤 단어의 의미를 자신에게 물어보면, 쉽사리 말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거나 질문자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한다. 이런 현상은 현시대에서 밀고 있는 교양에서 파생된 것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지식을 갖춘 사람 또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이런 노력이 교육이나 환경을 통해 강제로 배어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기본적인 질문에도 뜸을 들인다. 틀리고 싶지 않아서. 정답을 알고 있다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서.
보이는 대로 보지 말고 숨겨진 것을 보라
들리는 대로 듣지 말고 의도를 파악하라
아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모르는 것을 생각하라
위와 같은 종류의 격언들은 우리들의 판단력을 고민하게 만든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를 자극한다. 보이는 대로 듣는 대로 아는 대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참으로 당연한 일임에도 그러지 못하게 만든다. 격언의 핵심이 '앎'에서 '척'으로 바뀌는 경우다.
우리는 표현을 위해 대화를 하고 나아가 소통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소통은 이전부터 기업이나 개인, 다양한 집단에서 화두로 다뤄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소통의 핵심이 표현이라는 것에서는 조금 벗어나는 게 아닌가 싶다.
표현은 그냥 나의 상태를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 단어의 정의 그대로 그냥 나를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나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필수 전제로 되어야 한다. 정직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그 어떤 표현이라도 상대에게 오해나 속임으로 다가가게 된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너무나 당연한 걸 잘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많이 있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대화나 소통에서 어려움을 겪는 모든 시작점은 정직함이 제외된 표현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흔히 말하는 '센스 있는 사람'이 인기 있는 이유는 나의 표현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내가 잘 표현하지 못해도 척하고 알아듣는다. 문제가 생길만한 상황에서 앞일을 내다보고 적절한 대처로 위기를 모면한다. 내 옆에 이런 사람이 친구나 동료로 있다는 것은 인복의 종착점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센스 있는 사람은 사람보단 신에 가깝다. 항상 부지런하고 절대 지치지 않는 배려만을 하는 성인과 같다. 대화와 소통의 의미를 살펴보았을 때 이런 센스 있는 사람과의 대화와 소통은 나의 역할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표현을 할 때 정직함이 기본으로 담겨 있다면 센스 있는 사람이 필요가 없다. 센스 있는 사람이 인기가 있을 일도 없다. 센스 있는 사람은 너무나 힘들고 지치는 역할이며 그 사람에게 돌아가는 건 더 많은 일들과 더 많은 스스로의 해석만이 남는다.
간혹 나는 잘 표현하는데 상대가 나를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알기론 잘 표현했는데 잘 모르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말로 하지 않고 추상적인 행동으로 표현했거나, 말로 전했더라도 언급해야 하는 내용은 하지 않고 빙 둘러 '예상'을 하도록 전달했을 경우다.
비언어적 표현이 중요하다고들 말하지만 아이를 둔 부모에게나 중요할 뿐이다. 일상생활을 하는 일반인들에게 비언어적 표현이 중요하다는 것은 동의할 수 없으며 오해와 논쟁의 관계만을 양상 할 뿐이다. 특히 소통을 원하는 사람들이 비언어적 표현에 집중한다는 것은 그저 안타까운 마음만이 든다. 비언어적 표현을 아는 것이 업인 전문가들조차 오판에 여지가 많은 것이 비언어적 표현이다. 참고의 목적으로 표현을 이끌기 위한 방식의 발판으로 삼는 것은 좋으나 대상을 판단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비언어적 표현은 마치 심리학 책 몇 권 읽고 너는 내 손안에 있어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잘 표현한다라는 것은 어떤 능력이 아니라 그냥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행위이다. 다만 그 행위가 어려운 이유는 다양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용기. 나의 부끄러움을 전해야 하는 용기. 표현하고 싶지 않지만 표현해야 하는 상황에서의 용기 등 많은 용기들이 필요하다.
대부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의 어떤 면을 표현해야 할 때 정직함을 제외한 애매한 표현들을 하곤 한다. 이런 표현들은 상대에게 대화와 소통으로 다가갈 수 없다. 그냥 허공에 혼자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앞에 있는 사람이 센스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거의 대부분 허공에 혼자 말할 확률이 높다. 나중에 자신의 부족한 표현을 살피지 않고 상대를 센스 없는 사람으로 폄하하곤 한다.
소통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상황에서 만나 서로 다른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며 이 과정이 이루어지기 위한 기본이 되는 것이 표현이다. 정직함이 없는 표현은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며, 소통에 다다를 수 없다.
물론 정직한 표현만을 하는 것이 때로는 상대의 감정을 살피지 않는 냉소적인 사람으로 다가갈 수 있다. 상대가 기분이 상하지 않게 적절하게 잘 표현하는 방식은 존재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우선 기본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직한 표현은 가장 중요하며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난 정직하게 잘 표현한다고 확신이 든다면 그때부터 표현의 방식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 나는 아직 표현의 방식이 아닌 표현의 기본에 충실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해야지 배려가 가능하다. 안다는 것의 첫 단계는 거짓 없는 표현이다. 통계학적 사례나 행동의 관찰/판단으로 시작하고 유지하는 관계는 그저 통치의 관계나 답정너와 같은 답정관(답이 정해져 있는 관계)처럼 다가갈 뿐이다.
서른의 중반. 어떤 만남이던 긴장하고 기대했던 예전과 다르게 이제는 어떤 만남이던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성격이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정직하게 표현하려 노력한다. 의미 없는 주절거림으로 '착각'하는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점이 나에게는 더 크게 느껴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