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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연필 Oct 18. 2017

귀찮음이란 질병

 질병이 갉아먹은 신뢰

"이제 조금씩 지쳐. 아니 귀찮아. 누군가를 위해서 내가 노력하는 거"

"그 누군가가 누군데?"

"다. 나 빼고 다"


20대 후반. 사업을 시작한 친구에게서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었다. 자신감이 넘쳐나고 던지는 말에는 힘이 실려있던 친구였다. 그런 친구 입에서 나온 대사는 그 어떤 힘도 없었고, 보이지 않는 가시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의심하지 않고 생선살을 삼키듯 오물거려 넘긴 그 대사는, 물을 마실 때마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나를 괴롭혔다.


그로부터 그 친구와의 모든 대화는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대사 하나하나를 꼭꼭 씹어서 가시가 있는지, 상한 건 아닌지 오물거렸다. 식감과 맛과 신선함을 감별하는 미식가처럼 나는 조심스러워졌다.


시간이 지나 우리는 한솥밥 식구가 되었다. 오랫동안 믿었던 친구의 회사에서, 오랫동안 마음속에 모시던 선생님의 일을 맡게 됐다. 모험이었지만, 함께 같은 곳을 보고 나아가려는 그 시작은 기대와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 일은 나를 외롭게 했다. 일을 통해 외롭다는 기분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1년 6개월 동안 외로움과 함께 했다. 외로움에는 사장이 된 친구의 '나만 믿어'라는 근거 없는 대사가 들어있었고, 선생님이자 거래처 부장님의 '힘들지?'라는 위로가 있었다. 피곤함과 외로움 따위가 신뢰의 탑을 건드리지 않도록 달렸다. 그냥 목표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달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 시간은 내 몸과 내 안을 알 수 없는 병으로 망가뜨리고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7년이 넘게 사랑했던 연인과 작별을 고했고, 가족의 내분은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만들었다. 그리고 병을 만든 오랜 친구와도 끝을 선언했다.


무너지는 시기. 버텨야만 하는 시기. 나는 지쳐버렸고, 내 눈앞에 있는 먼지조차 닦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잊으려고 버티려고 하는 몸짓 하나하나가 구차하고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이처럼 자각됐다.


"귀찮아하는 사람들은 질병에 걸린 거야."
"무슨 질병?"

"지침병. 지친 거잖아. 그 이유로 해야 할 것을 안 하는 거 아니야?"

"근데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힘들 수밖에 없잖아. 우리가 무엇을 하던 결국 지칠 때가 오잖아."

"응.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마약 같은 그 대사가 싫어. 결국 자신을 망가뜨리잖아."

"너는 귀찮은 거 없어?"

"나도 있지. 많지. 많아지겠지. 그렇다고 그걸 핑계로 할 걸 안 하는 건 싫어"


귀찮다는 질병에 대해 질색하고 싫어했던 나는, 막 성인이 돼서 나눴던 그 친구와의 대화를 되새겼다. 이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대화이자 부질없는 기억으로 남을 것 같은 생각이, 그때의 기분과 날씨까지 기억하게 했다.


나는 '이게 마지막이야. 실컷 기억해'라고 인심 쓰듯 내게 속삭였다.








누군가에게 '귀찮아서...하기 싫어', '...하기 귀찮아'라는 대사를 들을 때, 이상하게 섭섭했었다. 내가 섭섭해할 이유는 없었지만, 대부분 섭섭하다고 느꼈던 대상은 좋은 사람, 좋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겐 기대가 있었다. 그 기대가 섭섭함을 만들곤 했다.


오랜 친구들 중에서도 많은 대화를 나눴던 친구. 이 친구에게 처음 들었던 그 귀찮다는 발언은, 그 날 그 순간 삼켰던 그 발언은, 안에서부터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안에서부터 찔러오는, 그 가시가 주는 통증은, 신뢰라는 탑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균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병들었고, 힘들었다.


이젠 귀찮다고 말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들에게 허락받지 않고 만든 내 기대와는 상관없이 섭섭하다. 그리고 두려워진다. 내 친구 같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한번 맛 본 그 귀찮음의 영역이 그 사람을 덮치진 않을까. 자신의 책임을 그 단어에 감추는 습관이 들진 않을까. 그렇게 누군가를, 나 같은 사람을 병들게 하진 않을까.


질문의 반복이 시작됐다. 끝없는 오지랖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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