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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연필 Nov 01. 2017

나를 이루는 요소, 습관

전화를 받았던 엄마의 표정

유년의 저녁. 저녁의 마무리는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전 아빠에게 전화를 건 엄마의 얼굴 표정에서 결정됐다. 곧 들어온다는 아빠의 대답이 돌아왔을 땐 평범한 가족의 저녁식사가 됐다. 그리고 대부분은 평범한 저녁식사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문제는 아빠와의 통화가 끝난 후 엄마의 표정이 보통 때와 다를 때 시작됐다. 아빠가 밖에서 저녁밥과 술을 드시고 들어오는 날이 이런 경우인데, 우리에겐 치킨 또는 공포로 상황이 나뉘었다. 엄마는 두 상황에서 항상 일찍 자라고 하셨다. 우리는 누워서 실제로 자거나 또는 자는 척을 하며 아빠를 기다리곤 했다.


이런 저녁은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의 귀처럼 아빠의 걸음소리가 크게 들렸던 것 같다. 걸음소리로 아빠라는 것이 분명할 때, 선잠을 깨고 돌아누워서 실눈을 떴다. 그리고 문쪽을 바라보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치킨이 들어있는 하얀색 비닐봉지가 손에 들려있을 땐, "다녀오셨어요" 큰소리로 외치며 문으로 급하게 마중 나가서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받았다. 아빠의 다리를 힘껏 안았다. 그러나 손에 하얀색 비닐봉지가 없을 땐, 바로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엄마의 공격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취기에 주무시기를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의 손에는 비닐봉지가 들려있지 않았고 평소처럼 자는 척을 했다. 하지만 이날 부모님들의 대립은 평소의 공포와는 다른 크기의 공포였다. 주고받는 말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가득했고, 이윽고 폭언이 오고 갔다. 귓속으로 들어오는 공포의 대화는 어린 나이에 상상하기엔 상세하고 잔인한 결과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수준까지 다다랐다. 목소리의 크기는 새벽 이웃이 깰 수 있는 크기까지 커졌다. 그 크기만큼 가슴이 답답하고 조여 오는 느낌도 더욱 강해졌다. 눈물이 나왔다. 어딘가가 다쳐서 아픈 고통의 눈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멈추지 않고 눈물이 나왔다. 내 안은 이 순간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간절함으로 가득 찼다.


순간 떠올랐다. 어느 날 안방에 있는 아빠와 부엌의 있는 엄마의 사소한 다툼이 시작될 무렵, 내가 나 때문에 그런 줄 착각하고 아빠한테 "잘못했어요"라고 했었다. 그런 모습에 아빠는 나를 잠시 응시하고 말을 멈췄다. 이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자는 척을 포기하고 벌떡 일어나 부모님에게 갔다.


"제가 진짜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진짜 잘못했어요. 앞으로 안 그럴게요"


공포에 크기 때문인지, 상황을 끝내고자 했던 간절함인지, 내 감정은 이 연기에 완벽하게 몰입됐다. 상황을 끝내기 위한 연기로 시작했지만, 멈추지 않는 눈물과 억울한 호소는 진심으로 변하게 됐다. 정말 내가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두 손을 모아 비비대면서 몇 번이나 같은 대사를 울먹이며 반복했다.


엄마와 아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정적으로 내가 흐느끼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엄마는 나를 안아주며 너 잘못이 아니라고 했고 그 말에 더 서럽게 울었다. 아빠는 조용히 자리에 누웠고, 우리 가족은 모두 잠을 청하기 위해 자리에 누웠다.








어릴 때 있었던 이 사건은, 지금의 내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되돌아볼 때마다 상기되고 있는 중요한 나의 요소라는 것을 느낀다. 일종의 습관처럼 자리 잡은 눈치. 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본다. 그 표정을 기점으로 눈치를 본다.


정확하게는 소중한 내 사람들 사이에서 감정의 문제가 생기는 부분, 이 부분에서 눈치를 본다. 그 외에 다른 부분에서는 반대로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이 깊게 자리 잡은 습관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 자신을 등한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나로 인한 잘못이 아님에도, 내가 더 아프고 큰 상처를 입었는대도 상대방의 감정이 더 크게 다가왔다. 상대방들의 감정 평화에 희생양으로서 유능한 인재가 되곤 했다.


이 습관이 좋고 나쁨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어버린 지금, 잠깐이라도 이 습관을 버리려고 할 때면 그들은 말한다.


'너답지 않아'

'너 좀 변했어'

'무슨 일 있어?'


깊게 자리 잡은 습관은 보는 이들에겐 그냥 그 사람을 이루는 요소일 뿐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상기하게 된다. 그리고 깊은 회의감에 빠진다. 내 본질에 대한 질문과 사고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타인이 보는 나에 대한 의식을 무시할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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