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밝은 색의 감정이 아닌 어두운 색의 감정들을 각자의 방식대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이런 견딤의 취향이 다른 것을 상기하니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견딤의 효율적인 방식이 존재하는가
견딤이 필요 없는 사람이 존재하는가
인간의 견딤이라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 이 질문의 답이 먼저 나와야 효율적인 견딤으로 넘어갈 수 있다. 우리는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까. 나치가 만든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의 견딤과, 현시대의 일상적인 사람들의 견딤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현시대의 견딤은 대부분 정신적 통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때문에 그 통증의 정도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우울증 및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의 수가 급격하게 늘고 있는 현상은, 보이지 않는 통증이 만연한 세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통증의 한계는 측정을 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측정하고 치유한단 말인가.
고문과 같은 물리적 통증을 유발하는 견딤은, 사람의 정신적 견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한계점을 가늠할 수 없다. 결국 정신적 통증의 이해가 우선시되어야 하는데, 정신적 통증의 재단이 불가한 시점에서 이해를 하는 것, 견딤의 효율을 찾는다는 것은 힘들 것 같다. 그래서 '견딤의 효율적인 방식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넘긴다.
그럼 견딤이 필요 없는 사람은 존재할까. 물리적 통증에서만큼은 통각이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견딤의 존재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바늘 하나에 살짝만 찔려도 우리의 몸은 반응을 하고 움직인다. 그 반응의 시간이 견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신적 통증의 관점에서는 그 견딤이 필요 없는(그렇게 보이는) 사람들을 간혹 경험한다. 이런 사람들은 긍정 또는 무관심에서 비롯한 회피 능력이 뛰어난 것인지, 정신적 통각이 없는 것인지 신기하면서 부러울 따름이다.
결국, 견딤의 범위가 물리적 통증과 정신적 통증 두 가지 모두를 다루는 것이라면, 견딤이라는 것은 분명 필요하면서도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는 하나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의 견딤의 취향은 나의 견딤의 취향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나는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일까. 내 견딤의 취향은 무엇일까.
내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나는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이상 죽음의 통증을 알 수 없고, 알 수 없다는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의 크기로 그 통증의 정도를 가늠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통증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삶은 아니다. 삶은 개인의 경험을 통해 통증을 실제로 느낄 수 있다. 개인이 느끼는 삶의 통증이 자신이 예상했던 죽음의 통증보다 크다면, 자살이라 불리는 많은 논란을 야기하는 극단적 판단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내 견딤의 취향은 '보류'인 것 같다. 지금 온 통증이 견딜 수 없는 크기라고 판단된다면, 나는 그들을 맨 뒷줄로 세운다. 보이지 않는 거리만큼 제일 뒤쪽으로. 하지만 결국은 책임과 견딤의 방으로 초대를 해야 한다. 분명히 받아야 하는 손님이고, 나는 계속 기다리게 만든다.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정신적 체력이 될 때까지. 이것의 나의 견딤의 취향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