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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연필 Nov 29. 2017

이상형의 정의

2017년 11월 29일 00:38. [이상형]을 주제로 글을 적기 위해 과거를 꺼내어본다. 내 수전증과 기침을 조금은 가라앉혀 줄 수 있는 음악을 틀어보자. 어떤 게 좋을까. 누군가에겐 자장가 스타일이라 불리는 Kings of Convenience의 음악으로 시작해보자. 첫 곡은 Cayman Islands. 이제 조용히 허공을 보자. 그리고 집중하자.

내 과거의 시기를 기억하는 단계. 세 명의 여자가 떠오른다. 교복을 입었던 때, 군 제대 후 복학하기 전, 복학 후.


교복이 잘 어울리고, 통통하고, 웃는 눈이 이쁘고, 바보 같았던 내 실수들을 사랑스럽게 웃어넘기고, 나의 말도 안 되는 아집에 섭섭했음에도 내 기분을 먼저 생각하고, 공원 벤치에 앉아 끝도 없는 질문을 하고, 4호선 끝 당고개역 계단과 통로 사이에 서서 집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오기까지의 시간을 보내도 마냥 좋아서 나를 바라보고.


11cm 굽을 신고 또각거리는 발걸음이 자연스럽고,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지만 내 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가 아니고, 술을 좋아하고, 모임을 좋아하고, 디자이너로서의 색이 있고, 아니라고 생각한 부분에서 정색을 할 줄 알고, 작은 선물에도 감동하고, 연하라서 더욱 보여주려 했던 남자이고 싶은 남자의 유치함을 좋아하고.


어색할만한 복학생에게 거리낌 없이 말을 거는 친화력이 있고, 무심한 듯하면서 따뜻한 쪽지를 건네는 배려가 있고, 알 수 없는 사투리를 구사하고, 멍한 표정과 눈빛을 가졌고, 운동신경이 좋고, 게임을 잘하고, 매운 걸 좋아하고, 꽃을 좋아하고, 민망할 때 아이처럼 달라붙어서 없던 애교를 부리고, 솔직하려고 노력하고, 승부욕이 강하고, 만화책을 좋아하고, 양 조절을 못해서 항상 나오는 요리가 3인분 이상이지만 맛있고,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가졌고, 영화를 싫어하고, 한 때 빠진 영화의 여주인공 계륜미의 느낌을 가졌고, 관능적이면서 순수하고, 귀찮을 만큼 손을 잡는 내 버릇을 이해하고.


다시 과거에서 빠져나와 내 귀에 집중하자. 음악은 한 바퀴를 돌았다. 생각보다 빨리 쓴 것 같다. 몸에 땀이 나고 열이 난다. 단순한 나열을 통해 그녀들이 가진 것을 정리만 했을 뿐인데 생각보다 눈에 피로가 빨리 왔다. 음악을 바꿔야겠다. Iron & wine의 Fever dream을 반복 재생하자. 3회 반복이 될 때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해보자.


목이 보이는 머리스타일과 하얀색 상의는 나의 외형적 취향이다. 하지만 이상형은 아니다. 이상형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없었고 난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상형은 나에게 필요한 주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글쓰기 프로젝트를 통해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됐다.


난, 내가 사랑에 빠진 여자. 그 여자의 모든 점들이 이상이 된다. 사랑이 주는 감정은 인간의 깊숙한 예민함과 진심을 꺼내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든다. 결국 이성적인 시선이 아닌 그 감정에 취한 시선으로 그 사람만을 보게 한다. 콩깍지라 많이들 부르지만, 장기간의 사랑이 불가하다 여기는 이들이 만든 농담 섞인 단어유희일 뿐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이 현상은, 이상형이란 추상적 환상을 실존하게 만든다. 바로 지금, 내가 보는 그 사람의 모든 것. 혼자일 때의 이상형은 사랑의 감정이 포함되지 않은 상태의 정의인지라 신뢰가 가지 않는다. 언제든지 사랑에 빠진 사람을 통해 무너질 테니.


만약, 애써 일부러, 꼭, 혼자일 때의 이상형을 말해달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한 번 생각해본다. 생각해보니 어렵지 않다.


잘 모르는 나를

믿고 좋아해 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


6번째 곡이 반복되고 있다. 역시 3회 완성은 욕심이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오늘 저녁에 함께 할 글쓰기 모임 사람들에게 미안해진다. 정리하고 줄이고 싶은데, 생각의 흐름대로 쓴다는 것은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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