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드레스셔츠를 꺼내 입었다. 밑단추를 잠그기 어려웠다.
'건조기 때문에 옷이 줄었나?' 별생각 없이 체중계에 올랐다. 93kg 평생 가장 당황스러운 숫자였다.
2018년 가을, 나의 몸무게는 인생 최고치를 경신했다. 20대까지 70Kg 전후로 유지했는데 직장생활이 시작된 후로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듯 자묵하게 늘더니 마침내 90kg대를 돌파했다. 숨쉬기 운동밖에 안 하는 주제에 식욕은 가을의 말처럼 주체를 못하니 필시 연내에 0.1톤을 넘기고야 말리라.
그 무렵 업계 몸짱으로 불리는 M대표가 기다렸다는 듯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헬스케어 사업을 하고 있는 P대표와 함께 아저씨 대상의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기획 중인데 참여해 보실래요?" 지체 없이 하겠다고 했다. 아저씨와 다이어트의 조합은 뭔가 어색하지만 M의 기획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예전 몸으로 되돌아갈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을까? 난 신차 출고일을 잡은 젊은이처럼 활랑거리는 마음으로 10월을 기다렸다.
드디어 디데이! 두 달간 진행되는 프로그램의 정식 명칭은 '아저씨 팩토리'였다. 아마도 팽팽하고 봉긋한 아저씨들 복부에 식스팩을 찍어주는 공장이 되겠다는 M의 의지였을게다. 참여조건은 배둘레가 100cm 넘는 45세 이상 아저씨. OT장소에 15명가량이 모였다. P대표는 운영방식과 몇 가지 주의사항을 설명했다. 매일 지켜야 하는 조건은 아침에 일어나 복부사진 한 장과 매 끼니마다 음식사진을 한 장 찍어 단톡방에 올리는 게 다였다. 규칙이 너무 간단해 오히려 의심스러웠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아침마다 아저씨들의 미쉐린 타이어 같은 뱃살 감상이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지만 힘들 건 없었다. 술자리를 피해야 해서 저녁약속은 일체 잡지 않았다. 가끔은 곤란할 때도 있었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며 위기를 모면했다.
두 달뒤, 나는 목표에서 3Kg 모자란 17kg을 감량했다. 두 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체중그래프는 당시 급락 중인 암호화폐의 차트처럼 보였다. 짬짬이 했던 크런치 덕분에 윤곽선이 희미한 복근도 살짝 보였다. 6인치나 줄어난 바지에 딱 붙는 셔츠도 더 이상 민망하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미뤄왔던 지인들을 만나 날렵해진 턱선을 칭찬 받고 싶었다. 하지만 지인들의 첫마디는 기대와는 달랐다.
"어디 아프냐?",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집에 무슨 일 있냐?" 심지어 암 걸린 거 아니냐는 말까지... 그제야 가만히 나의 얼굴을 들여봤다. 핼쑥해졌지만 매끈하던 이마의 자잘한 주름들. 콧방울 양쪽으로 팔자주름이 낙인처럼 깊게 파여 더 이상 에누리 없는 중년임을 선포하고 있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이 간단한 이치가 질량보존의 법칙 위에서 깔깔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