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해 질 무렵, 서울 변두리. 북부시장은 활기로 가득했다.
"물 좋은 꽁치 사세요!", "오늘 막 들어온 배추예요!" 호객하는 상인들과 흥정하는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절묘한 하모니를 만들고 있었다. 절인 고등어의 비릿함과 돼지머리의 느끼한 냄새가 석양의 공기를 빈틈없이 채웠다. 시장 모퉁이, 밝은 조명 때문에 유난히 눈에 뜨이는 과일 가게가 있었다. 노란 백열등에 반짝이는 과일들 중 당당히 센터를 차지한 바나나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일곱 살 때 딱 한 번, 부드럽고 달콤했던 바나나의 기억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한 송이에 만 원, 개당 천 원 꼴이다. 떡볶이 한 접시가 백 원, 짜장면 한 그릇이 오백 원쯤이던 시절이었으니 때쓴다고 쉽게 먹을 과일이 아니었다. 엄마 손을 잡고 졸라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늘 '다음에'. 그때부터 나의 유일한 희망은 늘 '다음에'.
바나나는 일 년에 한 번, 아니 할아버지 환갑 같은 특별한 날에나 겨우 맛보는 귀한 과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어쩌다 한 입 베어 물면 천국의 맛이 났다.
세월이 흘러 내가 어른이 되고, 수입자유화로 유동성이 당연시된 시절, 바나나는 특별함을 잃었다. 언제든 마트에서 살 수 있는 흔한 과일이 되었고, 그 맛의 감흥도 사라졌다. 작년 6월, 퇴근길 아내의 심부름으로 편의점에서 무심코 바나나를 집었다. 순간 추억이 끼얹듯 밀려왔다. 북부시장의 기묘한 활기,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이는 과일 가게의 불빛, 바나나를 사달라고 조르던 열두 살의 나.
집에 와 조심스레 바나나 한 개를 벗겼다. 소파에 앉아 첫 입을 베어 물자 잊고 있었던 그 특별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달콤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그 향기까지. 그제야 깨달았다. 바나나는 변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그 가치를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일상에 묻혀 소중한 것들의 의미를 놓치고 있었다.
문득 옆에 앉은 아내의 존재도 바나나처럼 당연해져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과 기이함은 어디로 갔을까? 아내에게 바나나 하나를 건넸다. 그녀는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선선하게 받아 들었다. 함께 바나나를 먹으며 오랜만에 서로의 일상을 나누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내는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나였다. 사랑은 바나나와 같다. 때로는 달콤하고, 때로는 씁쓸하다. 하지만 그 맛을 음미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의 두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