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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yworker Jul 22. 2024

내 헤어스타일의 비밀

말복 날 오후, 이발하려고 집 근처 미용실을 찾았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후, 가운을 걸친 채 의자에 앉았다. 거울 속 얼굴이 낯설다. 눈에 띄는 건 한 움큼 더 늘어난 흰머리, 지난달과 다른 모습에 흠칫 놀랐다. 세월의 흔적일까? 아니면 마음의 반영일까?


나의 작은 역사는 헤어스타일 변천사에도 남아있다. 마루에서 자줏빛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바가지를 눌러쓴 채 발톱 깎는 강아지처럼 얌전히 앉아있던 유년시절. 커다란 재봉 가위 날이 귓가를 스치며, 차가운 금속 감촉이 오싹하게 피부를 파고들었다. 엄마의 손길이 바빠질수록 내 머리칼은 점점 균형을 잃고 어딘가 모르게 기이하게 변했지. 그때 나는 울었을까?


입학 통지서에는 진한 글씨로 ‘스포츠 스타일로 단정히 정돈할 것!’이라 적혀 있었다. 그렇다. 중학교 입학과 함께 내 머리칼은 자유를 잃었다.  왜 ‘스포츠’라고 부르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당시 운동 선수들 머리가 하나같이 짧아서였을까? 중고등학교 6년 간 강제로 ‘스포츠’를 유지하면서 짧은 헤어스타일도 변주가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와 친구들은 특히 슬램덩크의 주인공들 같은 스타일을 좋아했는데 난 그중 능남고의 ‘윤대협’ 같은 스타일을 갈망했다. 


옆머리는 직각으로 바짝 깎아주세요. 앞머리 중앙은 최대한 길게, 윗머리는 각지지 않되 너무 둥글면 안 돼요.” 짧은 머리일수록 세세한 부분이 중요했다. 하지만 사각턱에 마징가Z를 닮은 이발사 아저씨는 타협하지 않는 얼굴로 대꾸도 없이 ‘채치수’를 만들었다. 맨날 하던 대로. 어느 날 진정한 디테일리스트인 내 친구 S의 머리에 오십 원짜리만 한 땜통 두개가 생겼다. “우씨, 그 아저씨 일부러 오래된 바리캉으로 땜통을 만든 것 같다.” 난 그제서야 이발소에서 세세하게 주문 하는 건 더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미장원 문을 처음 열은 건 청춘의 문턱, 고등학교 2학년때였다. 미장원은 신세계였다. 향기로운 샴푸 냄새, 부드러운 의자, 친절한 원장님까지 모든 게 좋았다. 이곳이야말로 땜통의 공포를 피하는 동시에 나의 디테일을 완성시켜 줄 최적의 공간이었다. 사실 가장 좋았던 건 소파 옆 테이블에 잔뜩 쌓여있던 철 지난 잡지들이였다. ‘여성중앙’같은 여성지가 대부분이었는데 책장을 넘기다 과감한 화보라도 나오면 심장이 요동치고 얼굴은 붉어졌다. 누가볼까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때마다 은밀히 훔쳐보는 긴장감이 묘하게 즐거웠다.


성인이 되면서 더 이상 누구도 나의 헤어스타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솜씨 좋은 미용사를 찾아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때로 파마의 물결과 염색의 변신을 통해 새로운 나를 만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50대. 지금은 더 이상 멋진 스타일보다는 그저 머리숱이 줄지 않기를 소망하는 평범한 중년의 모습이 되었지만 한때의 화려했던 헤어스타일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다.


머리카락 한 올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그 가벼움 속에 나의 서툰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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