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S는 오늘도 지금은 자기 PR시대라며 사소한 자랑을 끝없이 늘어놓는다. 그럴 때마다 그 모습은 마치 메마른 사막의 선인장 같았다. 주변의 수분을 모조리 빨아들이려 안간힘 쓰는 모습이 안쓰럽다. 그가 그렇게 갈증 내던 '인정'의 도파민. 그 순간의 기쁨은 진짜일까? 나는 그의 애정결핍증을 보며 우리 사회의 단면을 확인한다. 만족을 모르는 인정욕구와 자기 과시의 굴레 속에서 마멸되어 가는 현생 인류의 초상을. 그리고 무득 깨닫는다. 모두가 조금씩은 그와 닮았음을.
#2
"네가 가장 잘하는 게 뭐야?"
별내동 카페거리의 간판을 만개한 벚꽃이 가리던 봄, 야외 테이블에서 맥주 한 잔 마시다 말고 친구가 물었다. 바람이 꽃샘추위를 얼리고, 시간이 잠시 멈췄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고, 가슴 한구석이 옥죄어왔다. '나는 무엇을 잘하는가?'이 간단한 질문 앞에서 왜 이렇게 당황하는 걸까?
어릴 적 이웃집 아주머니들은 가끔 "OO이는 참 착하다"고 말했다. 그때 기분은 좋았지만, 평범함의 다른 표현일 뿐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무채색 옷을 입은 채 흐린 벽 앞에 서있는 아이의 옷 색깔을 칭찬할 때의 느낌 같달까?
나는 칭찬이 꼭 올림픽 금메달의 영광이나, 노벨상 수상과 같은 특별한 순간에나 어울린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적어도 다수가 도의하는 장면 정도는 돼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평생 학급반장 한 번 해보지 못한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딱히 일어나지 않았고, '착한 아이'이상의 칭찬을 받은 일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칭찬을 하는 데도 인색했다. 친구나 동료의 작은 노력이나 성과를 알아주는 것이 오히려 나의 부족함을 자인하는 것 같았다. 반면, 비판과 비난에는 능숙해졌다. 날카로운 말들은 혀 끝에서 맴돌다가 손쉽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객관'과 '근거'를 운운하며 '충고'나 '조언'으로 포장해 상대를 찔러댔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이 끝난 뜨거운 여름날, 여의도 공원 근처 포장마차에서 직장 선배와 언쟁을 벌인 적이 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네 말은 뾰족한 쇠꼬챙이로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아. 틀린 말이 아니라 해도 그런 식으로는 절대 상대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할 거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화가 났지만 한편으론 부끄러웠고 결국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3
새 밀레니엄이 시작된 2000년 초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베스트셀러가 있었다.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지 대략 짐작 가서 나는 제목에 실소했었다. 마치 월급을 모아 강남아파트를 살 수 있다는 말만큼이나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난 이제야 그 의미를 조금 알 것 같다. 칭찬과 비판 사이에서 균형 잡는 법을 배웠달까. 진짜 칭찬은 성장 압박이 아닌, 넷플릭스 추천작 공유처럼 소소한 공감에 가깝다. 칭찬은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고 인정해 주는 것. '좋아요'를 누르듯 진심 어린 리액션 한 번이 열 마디 말보다 낫다. 그래서 오늘 나의 작은 칭찬이 누군가의 하루를 춤추게 할 수 있다면 월금 모아 집 사는 것보다 더 기분 좋을 것 같다. 내가 그렇게 탈속한 사람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