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커머스에서 콘텐츠의 가치
이 글은 좁은 글이다. 개인의 직무 경험이 근거의 전부다. 학문적 근거를 찾을 수 없고, 거대 자본의 경험과 데이터로 부정될 수 있다. 그게 아니어도 세월과 시장의 변화로 이가 맞지 않는 주장이 될 날이 언젠가 올 만하다. 신뢰로 쓰이기보다 흥미로 읽히길 바란다.
라이브커머스의 본질은 <명분>과 <기회>다.
판매자와 구매자 양쪽 모두에게 그렇다.
판매자에게는 ‘기회의 제공’이라는 명분이다.
이로써 가격을 낮춰도 원래 가격은 그보다 높다고 주장할 수 있다. 고객에게 귀찮은 광고가 아니라 유익한 정보라며 다가갈 수도 있다.
구매자에게는 ’기회의 발견’이라는 명분이다.
이로써 본인이 계획하지 않던 소비를 현명한 소비라고 스스로 치환할 수 있다. 나중에 하거나 혹은 미루다 하지 않을 소비를 지금 단행하기도 한다.
양쪽 중 어느 한쪽이라도 이 본질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본질이 명분과 기회라는 점은 TV홈쇼핑도 낯익다. 그들의 비용 구조를 보면 확연하다.
‘기회’는 ‘어떠한 일을 하는 데 적절한 시기나 경우’ 혹은 ‘겨를이나 짬’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정의 아래 예문으로 ‘기회를 엿보다’를 적어놓았다.
TV홈쇼핑은 고객에게 명분을 전달할 기회를 엿볼 자리가 절실하다. 고객의 말로 표현하면 ‘놓칠 수 없는 우연한 기회’를 자주 만날 수 있는 접점이다. 그 자리가 TV 채널 번호이고 자릿세가 송출 수수료다.
더 좋은 채널일수록 채널 재핑(Channel Zapping)에 더 유리하고, 송출 수수료는 더 비싸다. 이 골든 넘버에 가까울수록 매출이 갈리고 비용과 수익성이 다르다. 그래서 홈쇼핑에서 송출수수료는 매출의 절반을 훌쩍 넘는다.
라이브커머스라는 포맷은 TV든 모바일이든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서 기회로 콘셉팅된 명분이 본질이다.
살다보면 잘 한다기보다 먼저 했다는 이유로 질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내게는 라이브커머스가 그랬다. 아래는 종종 받던 질문이다.
- 라이브커머스에서 커머스와 콘텐츠 중 뭐가 더 중요한가(상품과 가격 vs 내용과 출연자)?
- 라이브커머스에서 잘 팔리는 상품군은 무엇인가?
- 자사 쇼핑몰에서 자체 개발해 진행할 때 가장 고려할 것은 무엇인가?
이에 명분과 기회라는 관점에서 주관적인 답을 해보면 이렇다.
자문자답에 앞서 근거로 디미는 작은 경험들은 이러하다.
4년 전 쯤인 2016년 당시 나는 티몬에서 신규사업으로서 미디어커머스를 추진했다. 개인적으로는 CJ(주) 재직 시절인 2009년 무렵 그룹에서 추진했던 테마였다. 그 사이 시장환경은 격변했기에 같은 키워드로 전혀 다른 전개가 이뤄질 거라 판단했다. 고맙게도 회사에서 흔쾌히 허락했고 성실히 지원했다. 다만 경영진이 교체되고...
지금은 왕홍 라이브커머스라면 타오바오가 대표적이지만 2016년에는 모구지에였다. 타오바오는 하지 않았다(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지 몰라도). 그 외에는 국내외 어느 곳에서도 모바일 기반의 라이브커머스를 찾지 못했다.
기업에서 신규 사업이나 전략 업무를 수행한 사람은 안다. 신사업의 딜레마가 있다. 남들이 다 하면 고유한 경쟁력이 없다고 승인이 나지 않고, 남들이 아무도 안 하면 레퍼런스가 없어서 승인이 나지 않는다. 승인 잘 받는 레퍼런스는 주로 글로벌에, 시장이 크고, 사례가 1-2개일 때다. 웃기지만 그렇다. 팀원들이 모구지에를 찾아내 그나마 아이디어를 추진할 수 있었다.
이듬해 티몬에서 <티비온>이라는 이름으로 라이브 커머스를 시작해 퇴사할 때까지 700회 남짓 진행했다. 첫 회는 베타 방송으로 베피스 기저귀를 팔았고 3회차 방송에서야 비로소 정규 편성 체제를 갖췄다. 그래도 스튜디오가 없어 탕비실에서 방송하며 한 시간 동안 다이슨 청소기 4천5백만원을 팔았다. 이후 700회 동안 방송 매출로 거뒀던 최고액은 4억원이었고, 해당 상품은 당일 티몬에서 16억원을 팔았다. 가장 빠르게 완판시킨 방송은 시작 후 9분이었고, 방송 후 편집 영상으로 가장 많은 조회수를 얻은 건 약 350만회였다.
2020년 8월 현재 네이버를 비롯한 여러 플랫폼에서 라이브커머스를 하는 지금은, 위에 적은 내 경험의 숫자들이 빠르게 과거가 되고 있다. 이를 감안하고 위의 자문을 자답하면 아래와 같다.
커머스다.
상품, 가격, 구성이 우선이다. 출연자가 제아무리 유명한 셀렙이든, 엄청난 구독자를 보유한 인플루언서든 커머스적 요인 앞에서는 무색하다. 이게 뒤집힌 적은 없었다. 내용이 재밌고 시청자가 많은건 후순위다. 재밌어서 오래 보고 많이 볼 망정, 구매는 다른 얘기다.
700회 동안의 통계를 보면 95%의 시청자가 3분 미만의 시청 시간을 기록했다.
안 살 사람은 안 사니까 안 보고, 산 사람은 샀으니까 더 안 본다. 그나마 보는 사람은 살까말까 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내용이 재밌기를 기대하는게 아니라, 구매 결정에 도움을 받기 원한다. 딴 소리 하면 화냈다. 잠재구매자로서 시청자들은 방송의 재미보다는 얼마나 파격적 혜택인지를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길 바라거나 어떤 가치와 기능이 있는지 등 상품 정보를 보기 원했다.
우연히 지나가다 방송이 재밌다고 보거나, 출연한 인플루언서의 구독자로서 시청하는 사람들은 매출에 큰 도움이 되진 않았다. 팬들이 주는 매출 기여는 대개 해당 인플루언서 채널에서 더 원활하다.
(다만 깊게 살펴야 할 사항이 있다. 이는 라이브커머스가 기존의 이커머스 시장에서 단순히 기능이나 매대로서 작동할 때의 이야기다. 라이브커머스라는 기능이, 중국의 왕홍 커머스처럼 '인플루언서 커머스' 시장에서 주요한 수단으로 쓰일 경우, 이때의 라이브커머스는 본질이 인플루언서 커머스다. 외양이 라이브 방송의 형태를 보일 뿐이다. 이때의 라이브커머스는 상품의 가치만큼 관계의 가치도 중요하다. 인플루언서 커머스는 인플루언서가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맺은 관계를 기반으로 상거래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에서도 커머스에 특화된 인플루언서라면 그 관계의 가치에서 핵심이 인성이나 흥미보다 커머스의 가치 제안일테니, 커머스의 가치는 인플루언서 커머스에서도 여전히 중요하다.)
서두의 언급과 닿아 있다. 구매자 입장에서 기회라는 명분이 노골적으로 작용하는 상품군이 잘 팔린다. 타겟이 넓고, 용도가 보편적이며, 낮은 가격이란 걸 첫 눈에 가늠할 수 있는 품목이다. 여기에 ‘쟁여놓을 수 있는' 거라면 더 좋다. 남녀노소, 취향과 상황, 유통기한을 넘어서는 상품군으로서 파괴적인 가격과 구성일 때 좋은 성적을 거뒀다.
앞서 말한 내 경험 중에서 방송 시간 4억원, 일 매출 16억원을 팔았던 상품은 ‘90일 유효기간의 대명 리조트 숙박권’이었다. 9분만에 완판한 상품은 한눈에 알만한 정도로 파격적인 가격과 구성의 블랙박스 세트였다.
이에 반하는 품목은 고전을 겪었다. 인지도 낮은 브랜드의 신제품, 시각적인 차이를 보여주기 어려운 제품(낯선 브랜드의 기초 화장품/건강 보조식품), 취향이 좌우하는 각종 패션 상품(의류, 잡화, 보석, 색조 화장품, 액세서리 등), 쟁여놓기에는 부담스러운 구성(양이 많든, 유통기한이 짧든) 등이 그랬다.
거듭 말하지만 이는 모두 티몬이라는 한정된 플랫폼에서 겪은 과거의 경험이다. 종합몰과 전문몰은 성격이 다르다. 티몬은 전국민 대상의 종합몰이다. 그러니 여성 의류를 사려는 거대 트래픽으로 응집된 지그재그의 라이브 커머스라면 패션의 판매 양상이 다를 일이다. 수백만 명의 구독자를 가진 뷰티 인플루언서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서 화장품을 판매할 때는 어떨지 모를 일이다. 라이브커머스로 뉴발란스가 992나 327을 팔거나, 아디다스가 이지부스트 700을 판다면 화면이 거꾸로 출력돼도 매진되지 않겠나.
라이브커머스를 꼭 자사 쇼핑몰에서 개발하는게 좋을까?가 먼저 나올 질문이지만, 여차저차 해서 그런다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송출(노출) 위치다.
이 역시 서두와 이어지는 말이다. TV홈쇼핑이 시청자의 눈과 손이 빈번한 곳에 가장 많은 비용을 투입하는 것과 같다. 제일 잘 보이는 곳에서 클릭 없이 자동 재생되어야 한다. 우리 플랫폼에 접속한 사람들은 안 볼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만한 투자는 해야 이 서비스를 지속할지 말지 판단할 수 있다. 알람 설정이나 인스타그램 광고 돌린다고 외진 곳에 노출한다면 저조한 성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물론 판매할 상품이 나이키X사카이 콜라보 정도면 위치를 어디에 둬도 괜찮다. 구매자는 반드시 그 라이브를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사이트와 앱을 다운 시킬 것이다. 그 정도 아니면 라이브 커머스의 노출 위치를 한두 클릭 뒤로 배치해 놓고 구독/알람/인스타 공지 기대해요~만으로는 효과가 적다.
라이브커머스의 본질인 <명분과 기회>가 향후에도 퇴색하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다만 이 시장이 더 커지거나 이커머스 사업자들에게 보편화 된다면, 더 덧붙을 본질은 <관계와 제안(Relationship & Curation)>이 될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모바일의 라이브커머스가 <관계와 제안>의 본질까지 확장하지 않으면, 진화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라이브커머스는 기존 쇼핑몰의 타임세일이나 할인쿠폰 정도의 기능적 가치로 머물 것이다.
이는 TV홈쇼핑과 차이를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현재의 모바일 라이브커머스는 송출 방식만 다를 뿐 TV홈쇼핑과 본질적 차이는 적다. <관계와 제안>의 가치로 진화하지 못하면 인스타그램, 유튜브, 틱톡 등 거대 소셜미디어의 라이브커머스 앞에서 존재감이 옅어진다.
TV는 소파에 등 대고 앉아 수동적으로 채널을 돌리는 lean-back media 다. 모바일은 소비자가 능동적으로 소통하고 관계 맺고 서로 제안을 주고받는 lean-forward media 다. 우연히 만나는 접점(Channel-Zapping)에 명분과 기회를 의존하는 게 1세대 라이브커머스(TV홈쇼핑)였다. 모바일의 라이브커머스가 진정한 2세대 라이브 커머스가 되려면 1세대와 본질적 가치에서 우월해야 한다. 1세대의 한계를 넘어서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시기가 오리라 생각한다.
2세대 라이브커머스는 판매자와 구매자, 소비자와 브랜드가 서로 적극적으로 관계 맺고 제안할 것이며 그래야 한다. 그 바탕은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이 될 것이다. 그것이 곧 새로운 명분이고 또다른 기회로 선순환 될 것이다. 라이브커머스를 하려는 모바일 커머스 사업자들이 이를 주저하거나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유튜브와 틱톡에게 명분도 기회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허전해서 덧붙인다.
위에서 말한 총 조회수 350만회가 나왔던 라이브 편집본 영상은 정형돈의 도니도니 돈까스였다. 이 클립의 별명은 ‘저 세상 홈쇼핑’이라고 네티즌들이 붙여줬다.
티몬 티비온(TVON)은 모바일 커머스 내이티브로서 국내 최초의 라이브커머스였다. 그러나 그런 기술적 의의뿐 아니라 방송 자체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많았다. 형식은 TV홈쇼핑과 가까운데 내용은 요즘 유튜브만큼 날 것의 재미가 있었다.
p.s. 푸는 김에 몇개 더 풀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