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커머스에서 콘텐츠의 가치
0.
이 글은 29CM에서 일하며 <수요입점회>를 만든 얘기다. ‘이커머스에서 매대를 콘텐츠로 만든다’가 전략적 지향점이었다.
1.
뇌를 할퀴어라
이 말이 이 글의 요지다.
2.
이커머스 플랫폼에서 구매가 발생하는 고객의 여정은 다양하다. 플랫폼 밖에서부터 안으로 이어져 돈을 지불하는 단계까지 구매자는 플랫폼이 준비한 각양각색의 접점을 만나게 된다.
3.
‘매대(賣臺)’는 고객의 이 여정에서 구매가 일어나는 말단 접점이다.
4.
이커머스는 온라인 가상공간이라 매장(賣場)과 매대의 구분이 모호하다. 29CM이라는 플랫폼 자체가 매장이지만 29CM의 <수요입점회>는 매장 안의 매장일 수도, 매대일 수도 있다. 이러한 애매함을 피하려 굳이 매대라는 단어를 쓴다.
5.
위 2, 3, 4의 사정으로 인해 플랫폼이든 브랜드든, 이커머스에서 매대는 구매자를 불러들이고 맞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접점이며 수단이다.
매장(플랫폼)이 매대를 어떻게 기획하고 운영하느냐에 따라 구매자의 구매 전환이 달라진다. 매대의 경험과 기억이 구매자에게 긍정적이고 선명하다면, 플랫폼은 브랜딩 효과를 얻고 구매자는 정기적으로 재방문할 확률이 높다.
6.
매대의 역할이 구매 전환에 그다지 절실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상품 그 자체로 구매 수요가 확실할 때다. 이런 상품은 입고가 곧 매출 흥행이거나 대기 수요로 이어지곤 한다. 그래서 가격비교나 검색 엔진 같은 기계적 접점과 수단만으로 구매 전환에 모자람이 없다. 정성 들인 매대가 없어도 상품 상세 화면에 결제 버튼만 있으면 팔린다. 이미 그 상품은 큐레이션의 단계를 지나 목적형 쇼핑의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7.
그러나 큐레이션이 힘을 발휘하는 발견형 쇼핑의 단계에서는 매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매대에서 상품과 콘텐츠가 함께 진열되고 유통된다. 그 과정에서 콘텐츠와 커머스의 시너지가 나온다.
매장은 매대의 집합이다.
그 골조 안에 상품들이 들어서 있다.
8.
이런 접근으로 <수요입점회>를 만들었다.
9.
29CM의 대표적인 매대는 PT다.
PT는 창업자이자 당시 사장이었던 이창우 대표가 사업 초기부터 잘 다져놓았기에 순항하고 있었다. 시장에서 공급자에게도 수요자에게도 그 가치나 인지도가 잘 작동했다.
반면 '스페셜 오더’, ‘쇼케이스’라는 전략적 매대가 있지만 PT 대비 인지도나 소비자의 각인이 낮았다. 게다가 매출 성장을 위해 MD에게는 입점 영업을 지원할 직접적이고 강력한 도구가 필요했다.
(29CM은 2019년에 전년대비 2배의 성장과 이익 개선을 거뒀다)
나는 2019년 당시 29CM의 부사장으로 일하며 미디어와 콘텐츠 부문을 맡고 있었다. 빠른 성장을 위해 좋은 브랜드를 더 활발히 입점시키고 그들을 조명할 매대가 필요했다. 소비자에게도 29CM은 항상 새롭고 좋은 브랜드를 발견할 수 있도록 큐레이션 한다는 가치를 각인시켜야 했다. 29CM의 미션은 'Guide to Better Choice’ 다.
10.
여느 쇼핑몰과 마찬가지로 29CM도 이미 신규 입점 브랜드를 소개하는 매대는 운영하고 있었다. 'Weekly New Brand’라든가 ‘신규 입점 기념 기획전’ 같은 류의 매대였다. 29CM 답지 않았다.
팀원들과 논의하며 우리는 이 과제를 더 29CM 스럽게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업자의 언어로서 '신규 입점 브랜드’가 아니라, 일상의 언어로서 ‘고객의 더 나은 선택을 돕는’ 접점을 마련하고 싶었다. 그래서 몇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매대를 기획했다.
11.
첫째, 신규 입점 브랜드를 ‘나열’ 하지 말고 ‘제안’ 해야 한다.
- 제안에는 제안자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둘째, 제안은 업자의 언어로 하는 광고처럼 느껴지면 안 된다.
- 큐레이터의 언어로 더 나은 선택을 돕는 제안이 되어야 한다.
셋째, 매대를 브랜드화해야 한다.
- 매대가 브랜드화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매대의 정체성이 단순하고 명료할 것
그 정체성이 잘 표현되고 기억에 남도록 매대 이름은 쉽고, 직설적이고, 분명할 것
매대의 이름은 행동을 촉매할 뉘앙스를 지닐 것
제안은 설명이 아니라 설득, Information 이 아니라 Content 일 것
매대의 브랜딩은 이름의 노출 빈도를 높이는 게 아니라, 정체성과 콘텐츠의 밀도로 할 것
매대는 상거래의 도구이므로 혜택이 강력하되, 평범한 수준을 넘을 것
과한 혜택이니 만큼 합당한 명분과 제한이 있어야 할 것
12.
‘뇌에 스크래치를 남겨라’는 얘기였다.
13.
매대의 정체성, 혜택, 정책, 예산, 운영 방식, 브랜드 마케팅 방안 등을 정했다.
매주 수요일에 새로 입점한 브랜드를 소개하는 매대를 하루만 연다.
해당 브랜드를 대표하는 상품을 고른다.
- MD가 한다.
해당 브랜드를 제안하는 이유를 말한다.
- Editor가 한다.
에디터는 브랜드 소개서만 보고 쓰지 않는다.
사람들이 이 브랜드를 왜 좋아하는지, 어떤 가치를 느끼는지 찾아보고 에디터의 시각으로 쓴다.
상거래 제안의 미덕은 혜택이다.
29% 할인으로 29CM의 매대라는 각인을 시키자.
혜택이 크니 하루만 열자.
그리고 마지막 관문인 매대 이름 짓기가 남았다.
14.
이름 짓는 데 오래 걸릴 거라 각오하고 회의를 시작했다. 위 11. 에서 정한 원칙을 상기시켰다.
사람의 행동을 유발하는 이름이어야 한다.
행동을 유발하려면 이름에 언제/무엇이/왜/어떻게 등이 담겨야 한다.
우리의 무엇은 '주마다 만나는 새로운 제안'이고,
언제는 ‘수요일'이고,
왜는 '혜택이 무려 29%'이기 때문이고,
어떻게는 '하루만이니 그날 꼭 오시라'로 접근하자.
좋은 레퍼런스로 두 개의 사례를 말했다.
오래된 예로서 G마켓의 스타숍.
그 매대가 뭔지, 왜 봐야 하는지, 무엇을 기대하는지가 선명한 이름이다. G마켓이 마진 폭 낮은 가전 위주에서 패션으로 정체성을 전환하는 데 큰 기여를 했던 매대였다.
그리고 <수요미식회>.
수요일마다 맛있는 음식을 제안받는 프로그램으로 기억하기 쉽다. 그 시점(수요일)에 TV 채널을 떠올려 시청을 유발할 수 있다.
조건과 레퍼런스는 아이디어를 옥죄기도 한다. 그래서 아무말 대잔치부터 하기로 했다. 그러자 회의 시작 3분 만에 재기발랄한 팀원 한 명이 ‘이런 건 안 되죠?’라는 표정으로 소심하게 한마디 던졌다.
그러면 우리는 <수요입점회>?
회의는 3분 만에 끝났다.
13.
매대의 브랜딩화가 이름 짓기가 전부일 리 없다.
매대이지만 브랜드처럼 로고(BI)를 만들었다. 역시 기준을 세웠다. 상징적인 비주얼 로고가 아니라 직설적이고 가동성 높은 텍스트 로고로 했다.
매대의 브랜드 시그널 영상도 만들었다.
수요일마다 소셜미디어에 카드 뉴스도 띄웠다.
에디터들의 큐레이션도 강조했다.
큐레이션을 강조하려 매대의 몇몇 상품과 브랜드는 영상으로 제작했다.
14.
입점 일자를 수요일로 일괄 맞추는 불편함을 입점사들이 감수해줄까, 매대에 이렇게 공들인다고 수많은 기획전이나 이벤트 페이지와 구별될까. 달마다도 아니고 주마다 소개할 만큼 뭔가가 나올까.
여러 노파심을 뚫고 매대는 잘 자리잡았다.
<수요입점회> 첫 회에 어렵게 브랜드를 모아 5~6개였다. 몇 달이 지나자 40개를 넘었다. 입점회를 카테고리별로, 요일별로 나눠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다. 입점사들의 자발적인 바이럴이 소셜미디어에서 나타났다. 경쟁사들은 신규 입점 브랜드를 지원할 강력한 각인의 매대를 준비하며 <수요입점회>를 벤치마크 했다.
29CM은 2019년에 전년대비 두 배의 성장을 이뤘다. 2020년도 여전히 성장세라 들었다. 29CM이라는 플랫폼의 성장에 <수요입점회>라는 매대가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계산이 어렵지만, 기여했다는 자체는 판단이 어렵지 않았다. 2020년 말 현재에도 <수요입점회>는 PT와 더불어 29CM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매대로 존재한다.
15.
매대의 브랜드화는 효과적인 플랫폼 브랜딩이다.
그래서 매대의 브랜딩이 필요하다.
매대로서 고객의 뇌에 스크래치를 남겨야 한다.
미디어커머스는 '콘텐츠로 큐레이션 하는 이커머스의 유통 방식'이다.
미디어커머스로 접근해야 매대의 콘텐츠화로 매대의 브랜딩이 될 수 있다.
특히 발견형 쇼핑의 단계에서 그렇다.
매대는 상품과 콘텐츠의 집적이다.
매장은 매대의 유기적 결합이다.
미디어커머스에서 매장은 미디어다.
이 글은 두 편으로 구성한 연작이다.
1편 <29CM '수요입점회'를 만든 이야기>
2편 <무신사 '이옷활용법'을 만든 이야기>
이 글은 1편이다.
두 글의 연속성에 순서는 없으나 1편을 먼저 읽으면 좋다.
두 글에 공통으로 쓰이는 개념을 굳이 중복으로 적기 싫어 1편에만 써서다.
2편 <무신사 '이옷활용법'을 만든 이야기> 보러 가기 -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