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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캣 Nov 29. 2018

제오는 늘 거기에 있다

붉은 방에서의 기억

문을 열자 훅-하고 익숙한 냄새가 맡아진다. 

오늘은 좀 프레시한걸. 청소라도 했나. 

방엔 붉은 톤의 어두운 조명이 켜져 있고 제오는 그 아래 있다. 늘 그렇듯이.      


체체를 보자 제오가 문쪽으로 온다. 방안인데도 모자를 쓰고 있다. 

제오는 얼마 전 머리를 빡빡 밀었다. 염색과 퍼머로 지친 머리카락에게 휴가를 준 것이라 했다.      

체체는 맥주와 과자가 든 비닐 봉투를 내려놓고 싱크대 쪽으로 걸어가 컵을 집어 든다. 머그잔으로 할까? 아니다. 깨끗하게 씻어서 잘 엎어놓은 유리컵을 집는다. 작은 유리컵이라지만 투박한 머그잔보다는 맥주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2명이 앉으면 꽉 차고야 마는 작은 탁자 위에는 먹다 만 과자봉투들이 널려있고, 그 옆엔 꽁초가 가득한 유리병이 있다. 마시다 만 소주병도 있다. 반쯤 먹었나? 지저분한 좁은 공간. 그래도 싫지 않아...라고 체체는 생각한다.      


제오는 따지 않은 맥주를 냉장고에 집어넣고는 고무로 만든 병마개를 가져온다. 컵에 따르고 남은 맥주병에 꽂는다. 컵이 작아 수시로 뺐다 꽂았다 해야하는 데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듯하다. 얼굴 모양을 한 장식이 있는 병마개에는 볼펜으로 콧구멍이 큰 얼굴이 그려져 있다.  

    

“나에요. 이거.”

“크크 닮았다.”

“그쵸? 나중에 다른 소재로도 만들어 볼려구요. 재밌어요.”  

   

제오는 뭐든지 잘 만든다. 요리도 잘한다. 맘만 먹으면 청소와 빨래도 잘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림을 잘 그린다. 조금만 만지작거리면 요술처럼 뭔가가 손에서 뚝딱 나온다. 치즈 봉골레 스파게티, 반들반들하게 정돈된 방, 주름이 잘 잡힌 셔츠와 냉장고처럼 생긴 로봇그림까지도. 제오의 그 손은 지금 체체가 맥주잔을 비우면 병마개를 빼고 잔을 채워주고 다시 병마개를 병에 꽂는 일을 하고 있다. 체체는 맥주를 빨리 마시는 편이라 제오의 손도 덩달아 바쁘다. 

     

“예쁜 거 보여줄께요.”

“와 신난다”


체체가 가방에서 부시럭거리며 뭔가를 꺼낸다. 손바닥 반의 반만한 헝겊 인형 두 개가 나온다. 제오의 커다란 눈이 체체의 얼굴에서 인형에게 옮아간다.  

    

“고양이랑 강아지에요. 강아진 당신 거에요. 고양인 내 꺼고.”

“뭐에요?”

“핸드폰에 매다는 장식인데,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되요. 어디다 매달아도 되고 펜에 끼워도 되고. 난 내 디카에 꼬랑지 메달려구요. 이쁘잖아요.”

“어디서 많이 본 캐릭턴데....”

“그러게. 그런데 어디서 나온 애들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근데 응큼하게 생겨서 난 얘들이 좋아요. 고양이든 강아지든 착한척 순진한척 생긴 애들 딱 싫어요. 그냥 본색을 드러내는 얼굴이 좋아요. 응큼하지 않은 고양이랑 강아지는 없거든요.”

“고마워요.”

“난 선물하는 게 좋아요. 받는 것도 좋고. 그래서 우린 돈을 벌어야 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선물을 사주기 위해서. 밥도 사줄 수 있고. 난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 아- 돈 벌어야 하는데.... 돈을 벌려는 또 다른 이유는 책을 사야하기 때문이에요. 사고 싶은 책이 있는데 돈이 없어서 못사는 건 너무 해요. 책은 사고 싶을 때, 사고 싶은 만큼 사야 해요. 오늘도 한 권 샀어요. 무라카미 류의 <교코>요.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어서 읽어야지.”

“당신은 책을 빨리, 많이 읽는군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 책 읽다가 저 책 찔끔, 또 이 책... 이런 식으로 몇 권을 동시에 읽어요. 많은 때는 6~7권을 동시에 벌려놓는데, 그 중에는 끝내 읽지 못하는 것들도 있어요.”

“책 많아요?”

“음... 많이 버렸는데도 한 1000권쯤 있어요. 그 중엔 죽을 때까지 데리고 다녀야 할만큼 중요한 것들이 있어요. <해변의 카프카>에 나오는 그 도서관 있잖아요?”

“음... 난 그 책 안 읽었어요.”

“그런 도서관을 만들고 싶어요. 돈 많이 들테지만...”     


체체가 맥주를 마신다. 제오랑 있으면 말을 많이 하는 체체다. 다른 사람들하고는 조용하고 시무룩하게 지내는 편인데. 제오가 말을 별로 안해서 그런가? 그렇다기보다는 그가 자기의 말을 잘 들어주기 때문인 것 같다고 체체는 생각한다. 제오는 언제나 체체가 하는 얘기를 끊지 않고, 조용하게 잘 들어준다. 중간 중간 맞장구도 잘 쳐주는 편이다. 제오는 세상에서 제일로 다른 사람 얘길 잘 들어주는 사람일 거라고 체체는 생각한다. 제오는 눈이 예쁘다. 상꺼풀이 없는 커다란 눈에는 신중함과 겸손함이 담겨 있다. 그 눈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트집 잡고 볼퉁스러워져 있던 마음이 그냥 스르르 없어진다. 뭐랄까. 그래서 제오의 방을 찾는 것 같다고 체체는 생각한다.      

“얼굴 빨개졌어요.”


제오가 체체의 얼굴을 만진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작고 얇은 제오의 손은 언제나 따뜻하다. 그리고 섬세하다. 제오는 섬약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다. 희미한 조명같은 사람이지만 제오의 손끝에선 그만의 기운이 느껴진다. 뭉툭하거나 우악스럽지 않아 그가 좋다고 체체는 생각한다. 누구도 제오를 흉내낼 순 없다.      

제오가 체체에게 키스한다. 딥하지 않은 가벼운 입맞춤이다. 제오의 앞 이빨이 체체의 입술에 와 닿는다. 희미한 담배냄새가 체체에게 편안하게 전해져 온다. 부벼대고 쑤셔박는듯한 키스는 싫다고 체체는 생각한다. 너무나 가벼운 입맞춤. 그래도 떨리기엔, 제오를 느끼기엔 충분하다.      


“당신 귀여워요.”

“당신 냄새가 좋아요.”     


음악은 제오의 쥬크박스 중 하나에서 풀어지고 있다. 체체는 제오의 음악들이 그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이 작은 방도 그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음악과 방과 작은 유리컵과 희미하게 풍기는 얼그레이 티 향기가 더해져 제오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제오는 이 방과 이 방의 요소들이 만들어낸 이미지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체체는 생각한다. 제오는 동물적이라기보다는 식물적이고, 소리라기보다는 향기에 가깝고, 3차원보다는 2차원에 가까우니까. 그러고보니 제오를 처음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몇 번을 만났는지조차 체체에겐 기억이 없다.      


몇 십 곡의 음악을 듣고 다시 몇 번을 되풀이해 듣는다. 언제부터인지 쥬크 박스는 더 이상 음악을 내놓지 않는다. 쥬크박스도 잠을 자야 할 시간이다.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확인은 안된다. 제오의 이 방엔 시계같은 건 없으니까.      


“와줘서 고마워요.”


제오가 체체의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려 준다. 머리도 쓰다듬는다. 제오는 늘 강아지 쓰다듬듯 체체를 만진다. 그러고보니 제오는 생긴 것도 강아지랑 비슷하다. 차우차우 종이나 비글같은. 어쩌면 제오는 강아지 세상에서 온 강아지 왕자일지도 모른다.     

 

“뭘요.”


인간 세상의 말로 체체가 대답한다. 강아지 왕자가 웃는다.    

  

어두운 현관에 체체의 보라색 구두가 얼푸러져 있다. 한짝씩 찾아 신다가 체체는 비틀거린다. 제오가 다가와 잡아준다. 제오는 체체를 잡아 당겨 꼭 끌어안는다. 제오의 향기가 다시 전해진다. 작은 사람. 얇은 사람. 갓 목욕한 강아지같은 사람같으니. 체체도 제오를 안는다.     

 

체체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제오는 그 자리에 서서 말없이 바라본다. 어두운 조명 아래 제오가 서있다. 언제나 그렇듯. 체체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문이 닫힌다. 새벽 어두움이 아파트 복도를 삼킨다. 하나 둘 셋 넷... 체체는 숫자를 세면서 계단을 내려온다. 스물 네 개다. 문이 다시 열리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말없음이다. 언제나 그렇듯.     

 

체체는 하얀 격자문을 밀고 밖으로 나온다. 바람이 차다. 코트를 여며보지만 바람은 너무 차서 볼에 얇은 소름을 돋게 만들고야 만다. 조금 전 제오가 만졌던 볼을 이제는 싸늘한 바람이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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