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공부의 배신> X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을 통해.
아프리카에 사는 '스프링폭스'라는 산양들은 가끔씩 집단 전체가 맹렬히 달리다가 절벽에서 함께 떨어져 죽는다.
이 양들은 수천 마리가 함께 살다 보니, 앞쪽의 무리가 먼저 지나가며 풀을 먹어버리면 뒤쪽의 무리들이 먹을 것이 없게 된다. 그래서 뒤의 양들은 자꾸만 앞으로 밀고, 앞에 있는 양들은 점점 밀리다가 기어코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뒤의 양들은 비어진 공간에서 천천히 풀을 뜯어먹으면 되는데도 집단으로부터 떨어지기 두려워 악착같이 따라 뛴다.
결국 앞의 양은 뒤의 양이 미니까 뛰고, 뒤의 양은 앞의 양이 뛰니까 따라 뛰는 것이다. 그렇게 왜 뛰는지, 어디로 뛰는지 모르고 그저 서로 달라다가 절벽을 만나면 함께 죽는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 이십대의 모습도 이 산양과 비슷하지 않을까?
-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중, 오찬호 저>
소수를 살게 하고 다수를 죽게 내버려 두는 사회
지금 우리 사회를 가장 정확히 잘 표현해주는 문장이 아닌가 합니다.
모든 걸 개인의 책임과 소위 노오력의 부족으로 떠넘기고 경쟁에서 알아서 살아남은 자들만 쉽게 골라가 편하게 이용해먹으려는 무책임한 현실. 그 속에서 나의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남을 짓밟고, 어떻게든 구분시켜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밖에 없는 '괴물'이 되어버린 우리. 경쟁을 온전히 내면화한 우리.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인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들.
자신이 괴물인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설사 자신이 괴물인 걸 알면서도 괴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
'노력의 괴물'이자 '차별의 괴물'인 사람들.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해도 항상 부족함과 불안감을 느끼고, 쉴 때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는 사람들.
그 속에서 내가 투자한 시간에 대한 노력을 보상받고자 어떻게든 증명되지도 않은 과거의 지표들로 남들과 차별화하며 나의 우월감을 증명하려는 사람들.
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어버린 것일까요. 왜 쉽사리 괴물의 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요.
이번 글을 통해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X <EBS 다큐프라임 - 공부의 배신 3부작>을 통해 괴물이 된 우리의 자화상과 문제를 다뤄보고자 합니다. 글의 내용이 조금 불편하실 수도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얼마 전, <EBS 다큐프라임-공부의 배신 3부작>이 방영되었습니다.
경쟁에서 살아남고자, 좋은 직장에 가고자, 소위 명문대에 가고자 학창시절부터 미친 듯이 공부할 수밖에 없는 학생들의 모습과 끊임없이 남들과 나를 차별화하고 어떻게든 내가 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학생들의 모습, 그리고 함부로 꿈조차 꿀 수 없는 현실과 꿈을 꾼다 한들 사회가 인정해주지 않는 꿈은 처참히 짓밟히는 현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교를 가야만 좋은 인생을 살 수 있지 않느냐고 당연하게 말하는 사회.
성추행한 교사를 신고하는 일보다 내가 당장 좋은 대학을 가는 게 더 중요한 사회.
서열화를 통해서만 나의 노력과 능력을 인정받는 사회.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아마 모두가 이 사회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프로그램에 나타난 모습이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만연해온 편가르기의 습성과 좋은 삶을 살고자 학생 시절부터 경쟁이란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리고 이 정신 나간 경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내면화된 내 노력에 대한 보상심리 등은 우리를 노력의 괴물, 차별의 괴물로 만들어왔습니다.
고백하건대, 저 역시 단연 대표적인 괴물 중에 하나입니다.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왜 괴물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걸까요.
이에 대한 원인을 가장 잘 찾아볼 수 있는 책이 있습니다. 2013년에 출간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오찬호 저>라는 책입니다. 이 책과 <EBS 다큐프라임-공부의 배신 3부작>을 통해 우리의 자화상을 한 번 들여다볼까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는 위와 같이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을 '자기계발'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에서 찾아봅니다.
모두가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지금과 같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끊임없는 공부와 자기계발로 나의 능력을 증명해 보일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정말 열심히 노력만 하면 모두가 함께 좋은 직장에 가서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우리가 갈 수 있는 소위 좋은 직장이라는 자리는 굉장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마치 '의자 뺏기'와 같은 것이죠.
어차피 우리가 다 같이 앉을 수 있는 의자의 개수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모두가 함께 노력한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경쟁 구조에서는 필연적으로 낙오자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너무나도 당연히 이렇게 낙오된 사람들의 낙오 원인을 노력의 부족으로 여깁니다. 또다시 끊임없는 자기계발과 노력을 주문합니다.
그러면 낙오자들도 자연스럽게 '나의 노력이 역시 부족했어'라는 깨달음과 함께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이러니 지금 학생들 모두가 '단군 이래 최고 스펙'이 된 것이죠. 정말 이만한 스펙이 필요한 것일까요? 정말 그만한 능력이 요구되어 이렇게 노력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단지 소수의 '누군가'를 거르기 위한 편의 수단에 이용당하고 있는걸까요.
우리가 갈 수 있는 좋은 자리는 어차피 한정되어 있는데, 이 자리를 늘려줄 생각은 안 하고 모든 걸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떠넘기는 것 같습니다. 너네가 열심히 노력해서 알아서 좋은 자리에 들어오라며 무책임하게 모든 걸 떠넘기고 있는것이죠.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중의 각종 '자기계발서'와 언론 등이 발 벗고 나서 내가 지금 안 되는 이유를 나의 노력 부족으로 여길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계발서'는 지금의 사회는 어쩔 수 없다, 경쟁은 불가피하다, 어차피 안 변한다, 그러니 끊임없이 스펙을 쌓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우리의 미친 노력을 유혹하고 있고, '언론'에서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으로 사회에서 성공한 일부 사례들을 부풀려 얘기합니다.
또한 이를 위로해주는 각종 '힐링' 서적을 통해 이 위로를 발판 삼아 다시 이 미친 경쟁의 선 위에서 자기 위안을 하며 또다시 열심히 괴물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모두가 이 자기계발의 수행에 동참하면 그 어마어마한 참여자들 덕택에 성공하는 '하나의 사례'를 부풀리고 홍보하며 여러분 모두도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희박한 희망을 고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수천수만의 사례는 '노력 부족'이라는 말로 간단하게 정리 처분되고 말아버립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중)
이러한 사례는 결국 모두에게 희망 고문이 되고 결국 모든 책임은 또다시 개인의 노력과 능력 부족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이렇게 성공하는 사례가 있으니 너희들도 모두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거죠. 어차피 이 성공 사례는 당연히 소수일 뿐인데 말이죠.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자리마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젠 좋은 대학을 간다고 해도,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한다고 해서 결코 성공을 보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기계발과 성공의 간격이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강조되는 것은 늘 자기계발이라는 점입니다. 평생 '극복만 주문'받는 개인을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중)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내면화되고 세뇌되는 시점이 점차 내려가 지금은 초등학생마저 이러한 생각들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의 입에서 특목고 이야기가 술술 나오고 벌써부터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야 잘 살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으며 안정된 직장을 목표와 꿈으로 삼아 공부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죠.
심지어 우리는 자기계발의 결과물이 없어도 거기에 투자한 '과정'만으로도 "너는 나처럼 노력하지 않았잖아!" 하는 기준을 만들어내어 자신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내가 투자한 시간'에 대한 집착인 것이죠.
"이들의 자기계발은 매우 역설적이다. 취업되기 위해 그 힘든 자기계발을 하는 건데, 결과적으로는 취업과 상관도 없는 단순한 '상대적 비교에서 오는 자기만족'을 위해 자기계발을 하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우리는 차별의 찬성합니다 중)
'스스로'라는 의미가 담긴 자기계발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엄격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저자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취업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가는 '자기통제형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학생들의 박탈감과 불안감. '자기계발'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로서는 각종 차별이 너무도 합당한 주장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자기계발의 시대가 만들어가고 있는 이십대의 고유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째,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기
이십대들에게 개인의 고통은 그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낸 누군가를 본받으면서 마땅히 참아야 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십대들은 한편으론 취업을 못 하고 있는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 달라고 호소하면서 또 한편으론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요구에 반대한다는 점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이 또 어딨는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중)
둘째, 편견의 확대재생산
"어떤 대상을 제대로 모를 때 우리는 사회적으로 널리 퍼진 고정관념에 의존한 판단을 하기 십상입니다. 이러한 편견들이 자연스럽게 차곡차곡 내재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중)
셋째, 주어진 기존의 길만 맹목적으로 따라가기
두려움이 클수록 비교적 안전한 '기존의 길'에 대한 선호 역시 커지게 되고 다른 길은 거들떠보지도 않게 됩니다. '그 외의 길'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만들어내는 건 시간문제라고 합니다.
"이십대는 누구도 자신들에게 공감해주지 않는걸, 그리고 다른 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온갖 편견으로 재단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를테면 수능 성적이나 학교 이름만 가지고 자신을 손쉽게 판단해버리는 편견이 난무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이들은 앞으로의 모습, 이를테면 '번듯한 취업' 같은 사회적 성공 여부에 오로지 목을 맨다. 개인의 고통은 어디에다 하소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걸로 생각하는 게 속 편하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중)
이러한 특징들이 내재화되어 우리는 어느새 괴물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학생들은 취업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된 상황에서 그 과정에 조금이라도 균열을 일으키는 지점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되며 수능점수에 근거한 대학 서열을 기준으로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며 쾌감과 비감을 느낍니다.
대학생들은 흔히 이런 말들을 많이 하곤 합니다. "원래 내 실력은 여기가 아닌데", "수능시험 때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 해서 등. 이렇게 어떻게든 부연 설명을 하는 건 학교 이름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일들을 많이 겪다 보니 생겨난 일종의 자기방어라고 합니다.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다른 논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거의 신념 수준이라는 것이죠. 개인 노력 이외의 변수는 고민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 수능 점수의 차이는 어떤 차별의 타당한 근거로서 확산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상대방의 학교가 무엇인지가 먼저 궁금합니다. 사람의 잣대를 '학습 역량(수능 점수)'만으로 줄을 세워 판단합니다. 인간의 능력을 판단하는데 학습 역량은 정말 일부분일 뿐인데 이 같은 좁은 잣대로 실제 경험해보지도, 근거가 있지도 않은 사람 간의 역량 차를 지나칠 정도로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정관념이 희석될 기회는 차단되고 말아버립니다.
단지 수능점수에만 근거하여 사람의 역량을 판단하고 있는 것이 과연 논리적인 것일까요? 과거의 노력을 통해 얻어낸 성과를 가지고서 그 사람의 이후를 판단하는 게 정말 아무런 무리가 없는 것일까요? 설사 수능점수라는 성과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후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요?
이에 반박하는 사람들은 학력차별이 당연할 수 있다는 근거로 수능 준비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를 강조합니다. 이처럼 과거에 지나간 수능점수에 매우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들에게 가장 공신력 있는 '성과지표'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든 노력을 쏟아부은, 그리고 누구를 판단하는 근거로서 이십대들에게 그만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는 것이죠.
이러한 방식으로 모두가 결국 같은 논리를 가지고 가해자 역할을 하며, 또 그래서 당연히 피해자 신분이 되는 상황에도 매우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셈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지금의 승자독식사회 구조가 그 엄청난 불공정성에도 어떻게든 유지되는 것은 이처럼 모든 사회적 구성원들이 이 구조를 적극 지탱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구조의 피해자들이 가장 충실한 구조의 유지자로 기여하기에 사회는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 나간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는 '타인의 상승'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집니다. 개인이 경쟁에서 선택되지 않을 가능성이 과거에 비해 매우 커졌기에 수능점수라는 객관적인(실제론 객관적일 수 없는) 성과지표를 바탕으로 사람을 미리 재단하는 건 타인을 배제하는 전략으로서 너무나도 유용합니다.
"이들은 자기 학교보다 서열이 낮은 대학의 학생들이 재학 중 무엇을 한들, 또 해낸 들 관심이 없다. 무엇을 해도 자신보다 아래다. 정확히는 아래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중)
저자는 대학생들에게 '수능 점수'는 부동산 가격과 흡사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집값이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린 것처럼 이 서열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날라치면 대학생들은 자기 '위치 값'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이러한 사례는 각종 대학교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시면 너무나도 쉽게 찾아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처럼 십대 시절 단 하루 동안의 학습능력 평가 하나로 평생의 능력이 단정되는 어이없고 불합리한 시스템을 우리는 문제시할 눈조차 없습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본인이 당한 인격적 수모를 보상받기 위해 본인 역시도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택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한 것은 결국 개인의 절박한 상황을 방치하는 사회 시스템 덕분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문제 삼아 봤자 돌아오는 건 "세상이 원래 그런 거야" 하는 대답뿐입니다. 그저 모든 게 다 평소 자기계발을 통해 준비해두지 않은 당사자 개인의 탓일 뿐입니다.
'힐링'마저 사회적 압박으로 인한 고통을 치유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걸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게끔 합니다. 당연히 사회구조는 늘 그대로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선발될 인원의 수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집단 전체의 노력이 증가했다고 바늘구멍이 넓어질 수 있을까요? 그저 단군 이래 낙오자의 평균 능력만 날로 최고치를 경신할 뿐입니다.
"이렇게 과부하가 걸린 사회에서 '선발되지 않았다는 상대적 박탈감'은 과거에 비해 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로 인한 불안으로 심지어 지금 내가 힘들기 때문에 남도 힘들어야 한다는 고통의 평준화 논리마저 생성해내고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대학생들입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중)
이제 우리가 치유해야 할 것은 바로 자기계발 권하는 사회 그 자체입니다.
-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오찬호 저> 중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말라고 코너에 몰아놓고는 힘든 상황을 이겨낸 특별한 경우를 강조하는 건 이 사회가 실제로 공정하지 않은데도 이를 문제 삼지 말라는 격입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중)
지금의 사회가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고, 과정이 공정하고, 결과가 정의로워서 다들 노력만 하면 정말 잘 되는 사회인가요?
죄다 부모의 경제력에 달려 있는 일들인데 '기회는 공정했다, 그러나 너희들이 열심히 하지 않았다'라는 식으로 결과만 평가하는 게 합당한 일인가요? 우리가 흔히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당 부분 '자기 것'이 아닌 요소에 영향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게 사회가 할 일일까요?
"이 미친 자기계발은 전체 역량의 평균값을 상승시키는 결과가 분명 있다. 문제는 기업들은 이십대들을 '절대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애초부터 그 문을 통과할 사람은 가장 위쪽의 일부분일 뿐이다. '사회적 문제'가 사회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계발만 무작정한다는 것은 아파할 사람만 자꾸 더 만들어내는 노릇일 뿐이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중)
"왜 차별이 나쁜 거죠? 우리는 그만큼 열심히 노력해서, 능력이 있어서 그만큼의 보상을 받고자 하는 건데?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인생의 단 하루, 단 한 번의 시험 성적, '과거'가 돼버린 지표로, '과거'의 노력으로 너무나 쉽게 '현재' 자신의 능력을 합당화하는 게 과연 올바른 일인가요. 심지어 객관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일부 편협한 역량 하나로 사람을 평가하는 게 맞는 일인가요.
내 역량을 잘 키울 수 있는 좋은 교육을 받고자 좋은 대학을 가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나를 순전히 차별화하고 우위를 점하고자 좋은 대학을 가려는 사회가 올바른 사회인가요?
좋은 대학에 들어오면 이대로 끝인가요? 이제 내 능력은 나보다 안 좋은 대학의 사람들보다 무조건 뛰어난 것인가요? 언제까지 내가 '괴물'인 걸 정당화하고 있어야 할까요.
어쩌면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진짜 실력으로 경쟁하기엔 너무나 큰 두려움과 공포가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차별을 정당화하고 있진 않은지 돌이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사람의 능력을 제대로 정당하게 평가해주지 않는 사회, 기업이 일차적인 문제겠죠. 이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 기준'이 아직 미비한 건 아닐까요?
고작 스무 살에 불과한 친구들이 서로를 '당당하게' 구분 짓는 현실, 심지어 이젠 고등학교까지 따지며 나를 어떻게든 차별화하고자 합니다. 조만간 중학교, 초등학교, 유치원도 따져야 하는 현실이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나를, 지금의 내 능력을 증명하고자 우리는 '현재'가 아닌 '과거'를 들먹이고 있습니다. 그 과거도 대학교, 고등학교로 차츰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신빙성 있는(?) 지표가 '수능점수' 밖에 없기 때문이겠죠. 이젠 수능점수 마저 부족했는지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마저 그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증명하고 인정해 줄 다양한 수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이렇게 다양화해버린 수단이 또다시 '다양한 것끼리의 지위 경쟁'이 되어 지금의 학생부종합전형 등의 대학입학전형처럼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이 걱정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말 그대로 '자격'을 평가하는 '자격시험'과 자격이 되는 학생들을 대상을 무작위로 선발하는 '추첨제'의 도입이 아닌가 합니다. 난이도가 그렇게 어렵지 않은 자격시험과 무작위성을 부여한 선발 제도를 통해 지위 경쟁을 조금이라도 희석화하는 것이죠. 대학교 역시 선발 경쟁이 아닌 교육경쟁으로의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말 같지도 않은 얘기라고요? 이미 '네덜란드' 등에서는 이러한 선발 제도를 아주 잘 운용하고 있습니다.
"그니까 진작에 노력했어야지.."
우리 사회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말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설사 진작에 노력은 못했다고 해도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남들처럼은 먹고살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이러한 노력을 결코 허용하지 않습니다. 한 번이라도 삐끗하는 순간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는 '회복불가능'의 사회인 것 같습니다. 뒤늦은 노력이 너무나도 힘들고 거의 무의미해지는 것이죠.
국가와 기업이 발 벗고 나서서 미친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만 너무나 쉽게 골라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무책임하게 방치해두는 사회. 눈 감고 학생들의 등골을 빼먹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기만 합니다.
심지어 각종 공무원 시험과 고시, 입사 시험 등의 모든 준비도 하나같이 무책임하게 사교육과 개인에게 떠 넘기고 있습니다. 어떤 시험을 볼 것인지만 대충 딱 알려주고 이에 대한 각종 준비는 학생 개인의 돈을 써가며 혼자 모든 걸 책임져야만 하는 불합리한 현실. 이게 정말 말이 되는 걸까요?
적어도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구체적인 방법 정도는 알려줘야 하지 않나요. 적어도 국가에서 선발하는 시험만큼은 국가가 책임져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세상에 국가에서 보는 시험을 국가가 아니라 사교육이 준비시켜 주는 게 정말 말이 되는 것인가요? 제가 비정상인 건가요?
사회가 원래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고요? 개인이 바꿀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니 그냥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요? 어쩌면 누군가는 지금의 '잘못된 교육 시스템과 사회'라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은연중에 지금의 시스템이 유지되길 바라며 안도감을 느끼고 있진 않을까요.
언제까지 괴물로 남아야 할까요. 언제까지 자신이 괴물임을 정당화해야 할까요.
괴물을 잡아먹는 더 거대한 괴물이 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괴물의 탈을 씌우는 사회로부터 저항해야 할까요.
이러한 사회에서 당장 개개인에게 이 괴물의 탈을 벗으라고 하는 건 어쩌면 굉장히 무책임한 말일 겁니다. 괴물이 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으니까요. 애초에 경쟁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사회였다면 좋았겠지만..
그나마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이 미친 짓을 멈추고자 '덜'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 같이 '멈출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죠. 저도 멈출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하편 글에서는 '탈괴물화'에 대한 희망과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모색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