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에 드는 생각
브런치를 한동안 잊고 지내왔었다. 커리어를 포함해서 여러가지 일들이 많았고, 차분하게 앉아서 글을 쓸 여유가 생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최근에 스스로 글을 써보고 싶기도 했고, 주위에서도 글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추천을 해 주어 다시 브런치로 글을 남겨 보려 한다.
작년 여러가지 철학 책을 읽고, 강의를 보면서 다양한 사고와 논리에 공감도 하고 감탄도 하면서 보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나에게 인상 깊게 다가온 것이 실존주의였다. 또 이 주제가 명절에 적합하기도 해서 이에 23년 첫 글을 실존주의라는 거창한 주제로 써본다. 제목에 적힌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 는 말은 사르트르가 한 유명한 어구인데, 이 실존주의라는 철학 사조를 가장 잘 요약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모든 사물은 실존과 본질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실존주의의 출발이다. 본질은 그 사물이 내재한 목적으로, 예를 들어 의자는 누군가가 앉는 목적, 연필은 누군가가 필기할 목적 등 사물에 존재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이에 반해, 실존은 어떠한 목적 없이 이 세상에 던져져 있는 사물 자체를 나타낸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일단 인간에 한해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에게 본질은 무엇일까? 가장 단순하면서도 쉬운 답변은 유전자의 매개체 일 것이다. 인간도 다른 지구상의 생물 종과 마찬가지로 DNA 형태로 저장 되어있는 유전정보를 효과적으로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해 진화해 왔으며, 그것은 적어도 현대 과학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과학적 사실이다. 이 답변이 너무 인간을 단순하고 저급한 생명체로 인식하는 것 같다면,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최종 목적으로 여겨지는 '성공', '행복' 등을 다른 답변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르트르는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건 간에 실존에 우선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왜 다른 사물과 달리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우선하는 것일까? 나는 이를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정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주위에 있는 여러 사물들은 본질에 따라 실존이 정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필은 효과적으로 필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의자는 앉는 사람이 편안해지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여러 사람들이 각자 의견을 내놓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본질이 아닌, 개개인의 주관적인 의견이다. 결국 인간은 각자 가치관에 따라 본질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를 사르트르는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졌다' 라고 표현한다. 인간은 규정하고 구속하는 본질 없이 이 세상에 존재 자체로 던져진 특이한 사물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본질, 즉 목적을 질문하고 나 역시도 같은 질문을 계속 해왔었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우리에게 말해준다. 인간은 본질이 없이 존재가 우선하기 때문에, 본질은 각자 정하기 나름이라고. 이렇게 무한한 자유는 우리에게 해방감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모든 것이 열려있는 공간처럼 공포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이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던져졌다고' 다소 부정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들은 이러한 무한한 자유에서 오는 두려움을 잊기 위해 인간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애초에 인간에겐 보편적인 본질이란 없기 때문에 궁극의 답은 나올 수가 없다. 다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공동체주의로 무장되어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성공 혹은 행복이라는 체계를 도입하여 그 두려움을 회피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니 설날이나 명절에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거든 나의 본질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고, 다른 인간이 그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는 여정을 응원해 주는 것이 어떨까. 혹은 갈팡질팡하고 있는 사람에게 너가 생각하는 인생의 목적은 뭐야? 라는 질문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본질을 진짜로 자신이 만들어냈는지 여부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최근에 본 문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