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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호준 May 06. 2023

직장인 미술관 탐방기 (1)

Cece Philips : Walking the In-Between

[프롤로그]

 

 새로운 회사에 다닌 지도 어언 6개월째 접어들면서, 마음가짐에 좀 더 여유가 생기는 느낌이다. 이에 종로라는 회사 위치의 이점을 살려, 평소에 좋아하던 미술 작품들을 구경하러 다니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감상한 결과를 브런치 플랫폼에 연재 형식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기억력이 한정된 관계로 감상을 기록에 남겨 오래 보존하고 싶기도 하고, 기록을 하면서 미술을 지켜보는 나만의 관점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미술 전공자도 아니고, 대학교 때 관심은 있었지만 미술 강의를 제대로 수강한 적도 없다. 그런데 뭔가 그림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마치 세상에 그림과 나만 남은 듯, 혹은 그림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듯, 그림의 풍경이 온 세상으로 확장된 듯, 신기한 경험들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작가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를 정해진 공간에 담는 방식은 작가마다 개성이 넘치고 창의적이어서 감탄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미술관을 방문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작품의 사조, 미술사적 의미 또는 작가의 배경을 알고 보는 것이 작품을 보다 풍성하게 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저 주장은 일정 부분 맞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면에서 생각해보면 관람자 자신의 주관은 없이 타인(주로 비평가)의 생각을 그대로 따르는 부분이 나는 맘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작가들이 비평가들의 평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그것은 비평가들의 생각이지 나의 의도와는 관계가 없다고 하는 사례를 몇 번 보게 되면서, 작품을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기 전에 스스로 먼저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어졌다. 결국 작품을 관람하는 행위는 작품을 매개로 작가와 관람자가 대화하는 것인데, 중간에 전달자가 있으면 의미가 곡해될 수 있으니. 

 그렇다고 그 동안에 축적된 미술사 지식과, 전문가들의 비평, 작가의 배경에 대해 아주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탐방기는 나 자신의 감상을 먼저 적고 그것을 작가의 설명과 작품의 대한 설명과 비교해보면서 이 둘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는 내용으로 구성할까 한다. 나 자신의 감상은 줏대 있게 가져가되, 전문가들의 의견 또한 나 자신의 의견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경청한다면, 작품을 좀 더 다면적으로 살펴보게 되리라. 

 이러한 구성 하에, 앞으로 주위의 미술관과 갤러리들을 돌아보며 느낀 감상을 가끔 연재하려고 한다. 주기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하면 언젠가 또 적지 않을까. 첫 글은 경복궁 옆 현대미술관 근처에 새로 개관한 Peres Projects 의 Cece Philips 전이다. 


[Cece Philips : Walking the In-Between] 

2023년 4월 28일 ~ 6월 11일


  전시를 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작년 유퀴즈 방송 이후 팔로윙하고 있는 아트메신저 이소영님의 블로그에서 였다. 블로그에서 몇 작품들을 사진으로 봤는데, 보자마자 드는 생각이 에드워드 호퍼와 유사한 스타일이네? 라는 느낌이었다. 미술을 잘 모르긴 하지만, 에드워드 호퍼는 워낙 한국(?)에서 유명하고, 도시의 정적인 쓸쓸함을 워낙 마음에 파고들게 그린 작가라 기억하고 있는 몇 안되는 작가이다. 사람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은지, 이소영님도 블로그에 에드워드 호퍼 느낌이 난다고 적어 주셔서 뭔가 반가웠다. 블로그에서 봤을 때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비슷한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었는데, 전시 공간에서 작품들을 보니 생각들이 불빛처럼 떠오르면서 정리가 되었다. 갤러리나,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갖는 효과가 이런 것인 것 같다. 작품에 적합한 배경과, 배치를 통해 관람자가 갖는 작품에 대한 경험을 극대화 하는 공간. 


Peres Projects 내 Cece Philips 전시 공간


 내가 생각한 호퍼와의 유사한 점은 우선 명암의 극적인 대비이다. 사실 자연에서는 저 정도의 극적인 명암 대비가 나올 만한 공간이 잘 없다. 하지만 도시에서는 조명이라는 인공적인 빛을 내는 광원이 있기에 공간의 특정 위치만 대비되게 밝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공간 전체는 차가운데, 특정 부분만 밝아, 밝은 부분 또한 쓸쓸해 보이는 것이 호퍼와 씨씨 필립스의 공통점이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축약되거나 생략된 사람들의 표정이다. 위 그림에도 보면 알수 있듯이, 작가는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표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맨 앞에 나와있는 주인공 격의 인물도 이목구비가 있지만, 감정상태를 추측하기 위한 표정을 읽어 내기는 쉽지 않다. 어둡기도 하고, 뭔가 자세한 표정 묘사가 이루어져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뒤쪽 배경의 인물들은 아예 눈코입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호퍼의 작품에서도 드러나는 특징으로 기억하는데, 이를 통해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자들은 뭔가 알 수 없는 쓸쓸함을 느낀다. 이는 우리가 평소에 웃을 때보다는 무표정일 때, 기분이 쳐저 있는 경우가 많기에 작품 속 인물들의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으면 주로 무표정이거나, 쳐진 감정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공통점으로는 뭔가 힘이 빠진 색깔 톤을 들고 싶다. 전체적으로 작품에서 사용되는 색들이 채도(?)가 낮은 색들이 많은데, 이를 통해 그림이 뭔가 생동적, 활달한 분위기를 풍기기 보다는 좀 더 정적이고 다운되어있는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이제 차이점이다. 우선 씨씨 필립스의 작품은 호퍼의 작품보다 관람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명확한 편이라고 느껴졌다. 이는 작품에 거의 대부분 등장하는 붉은색 수트의 인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옷을 입은 인물은 작품의 중간 또는 앞을 차지하고 있어 작품에 중요한 요소임을 암시하고 있으나, 그렇게 즐거운 상황에 놓여 있지는 않다. 위 작품처럼, 붉은색 수트 여성은 안쪽에서 화기애애하게 벌어지고 있는 파티에 녹아들지 못한 채, 밖에 나와서 혼자 고독에 빠져 있다. 파티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되는 상황. 나도 자주 겪는 상황으로 저 여성의 상황에 저절로 감정이입이 되었다. 지금 혼자 빠져나와 있는 상황이 편하면서도, 나는 왜 저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할까라는 자책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 작가는 이 인물을 강조하여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소외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는 주인공격인 인물을 부각시키지 않는 호퍼의 작품들과는 뭔가 다른점이라고 느껴졌던 것 같다. 


 이 작품에서도 붉은 색 바지를 입은 인물이 중앙에 등장하는데, 앞 작품과 달리 이 두번째 작품에서는 상황이 반대라 재미있었다. 이 인물은 모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활발히 대화를 하고 있는 듯 한데, 뒤쪽을 보면 이를 창밖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모임에 따라 인물이 처한 상황은 달라질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일까. 이 글을 적으며 드는 생각인데 이번에는 노란 빛의 공간 안에 있는 사람이 소외되었다는 것 또한 앞 작품과 반대인 듯 하다. 

 그리고 항상 이러한 작품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인데, 화가들은 어떻게 이렇게 색깔을 잘 조합해서 쓰는 것인지 신기하다.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 우리가 실제 밖에서 보는 풍경의 색깔과는 상당히 다르지만, 어색하지 않고 조화로운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각자 화가들마다 자신을 대표하는 색깔과 조합을 정해두는 듯 하고. 항상 감탄을 하게 된다. 씨씨 필립스의 경우에는 노란색과 파란색, 그리고 포인트를 주는 붉은색.

 다음 작품은 인물들을 보다 멀리서 관찰하는 듯한 그림이다. 여기에는 여러 명의 빨간 옷을 입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무언가를 논의하는 듯 하다. 건물 안은 또 노란 빛으로 환하고 뭔가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안봐도 화기애애한 분위기 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어떤 사유로 나온 것일까. 본인들끼리 보다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혹은 파티가 지겨워진 것인지. 알기 어렵다. 다만 깊은 밤은 아닌 어스름 느낌의 빛깔과 나무의 일부 남은 초록빛, 그리고 노란 조명이 어우러진 풍경은 차분하고 아름답다. 


이번 작품은 뭔가 더 직접적으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관찰자가 창문에 비쳐 보이기 때문이다. 건물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을 작가로 추정되는 관찰자가 쳐다보고 있는데, 표정은 쓸쓸해보인다고 느껴진다. 들어가기엔 뭔가 부담스러워서 밖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인 것 같다. 이번에도 안쪽 공간과 바깥쪽 공간을 나누어 안쪽 공간은 노란 빛으로 따뜻하고 화기애애하게, 바깥쪽 공간은 파랗고 어두운, 쓸쓸한 느낌을 주게 대비시켰다. 그리고 창문에 비친 인물은 백인인데, 건물 안에서 대화하고 있는 인물들은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인 것으로 보인다. 앞에 작품에서도 인종적인 차이를 보다 드러내려고 한 느낌이었는데, 여기서는 극명하게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대비는 이후에 작가의 배경설명을 소개하면서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이 작품에서도 빨간색 수트를 입은 인물이 중앙에 등장한다.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다. 작품의 공통점을 하나 더 발견했는데 창문, 혹은 창틀로 안에 상황과 밖에 상황을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관람자가 상황 속에 있다기 보다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제3자로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만드는 것 같다. 이 느낌도 뒤에 소개할 설명을 읽어보니 작가가 의도한 부분이어서, 재밌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작품이다. 인물이 명확하게 등장하지는 않지만, 색깔이 참 곱게 잘 조화되서 본 작품 중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실제 미국에서 많이 보이는 약간 붉은빛과 회색빛이 섞인 주택벽과 노을이 지는 하늘, 그리고 작가가 자주 사용하는 청록빛 배경과 어두운 초록의 관목이 고즈넉하면서도 정적인 느낌을 준다. 여기도 안쪽에서 뭔가 여러명의 사람들이 서서 대화를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또 다른 방(?)과 같은 곳에 사람이 혼자 서 있는 모습도 어렴풋이 보인다. 이 분도 파티 부적응자인가 싶다. 


이제 비전공자, 비전문가의 눈으로 본 감상과 실제 작품의 배경, 작가의 의도를 비교해보자. 


씨씨 필립스는 영국 출신의 96년생 작가이다. 상당히 어린 작가여서 놀라웠고, 작품 활동 경력이 오래 되지 않음에도 전혀 신인 같지 않은 느낌으로 본인의 메시지를 세련되게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작품을 보면서 느꼈던 점을 전시 소개서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필립스는 이 작품들에서 경계의 공간, 시간, 상황의 탐구를 지속한다. (중략) 정장을 입은 여성들이 사는 대도시로의 기나긴 산책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낮과 밤의 사이라는 시간이 지닌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각 작품에 머무른다. 우리는 주변인이라는 위치에 선 채 열려 있는 창문이나 반대편 길가들을 통해, 덤불 혹은 소파 너머로 보이는 다양한 장면들을 관찰한다.

 

 느꼇던 대로 관람자는 관찰자의 입장,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주변인이라는 입장에서 작품 속 인물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낮과 밤의 시간이 지닌 비밀스러운 분위기는 뭔가 이들이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던 부분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산책은 여성, 특히 유색 인종 여성이 어떻게 공공 곤간을 점유하고 경험했는 가를 질문하는 장치가 된다. 근대성의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산택자는 주로 남성으로, 그들은 예리하지만 무심한 현대 도시 생활의 관찰자이다. (중략) 관찰자는 어디를 가든 간에 신분을 숨기고 몰래 평민들 사이를 거니는 왕자나 다름없다.


 작품에서 은연중에 제시하고 있던 여성, 그리고 유색인종은 역시 의도가 있는 선택이었다. 사회에서 여성과 유색인종은 본인들이 관찰을 하기 보다, 관찰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관람자는 아무런 위험이 없는 작품 밖의 위치에서 '안전하게' 작품 내 인물들을 관찰한다. 이것이 실제 상황이라고 해도 다를까? 라고 작가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전시의 제목인 "Walking the In-Between" 은 이러한 시선을 사이를 걸어가는 작품 내 인물들을 대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이 작품에서 관찰 당하는 인물들은 연약한 피해자로 등장하기 보다, 붉은색 수트를 입은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이들이 사회의 주변인으로서가 아닌, 중심에서 주목받고 싶은 바람을 표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여러 작품들이 있고, 그 중에는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거나, 이 세상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구성을 해체하고 추상화하는 작품들도 많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어떠한 특별한 메세지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세상에는 씨씨 필립스와 같은 작품도 있다. 씨씨 필립스의 작품을 보고 우리는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이 사회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된다. 능동적인 관찰자로서의 위치가 갖는 특권과, 시선을 당하는 입장에서의 조심스러움. 그리고 관찰자와 피-관찰자를 갈라놓는 사회 구조까지. 


화장실 소변기를 떼어다가 붙인 뒤샹의 샘부터, 최근 바나나를 벽에 붙인 작품까지, 예술의 범위는 계속 확장되오고 있는 듯하다. 다만 나에게 개인적인 예술의 범위를 물어본다면, 나는 관람자에게 생각 또는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씨씨 필립스의 전시는 시각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시선이 갖는 권력과 사회의 구조적인 차별을 지적함으로써 관람자에게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전시였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 젊은 작가가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해서, 한국에서 또다른 전시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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