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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선 Aug 03. 2020

때로는 직업이 아닌, 직업병이 나를 규정한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나는 오래도록 직업병이 달가운 사람이고 싶다.

ⓒ소선


얼마 전 출장차 지방의 한적한 카페를 찾았다가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던 적이 있다. 넓은 잔디밭이 펼쳐진 고즈넉한 한옥카페 입구에 ‘노키즈존'임을 고지하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팻말 속 문구는 정중했고, 그렇게 운영할 수밖에 없는 가게의 사정이 충분히 예의를 갖춘 말투로 쓰여 있었다. 게다가 나는 키즈가 아니었으므로 딱히 불편할 것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마음만은 퍽 불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를 떠나왔다.


사실 취직하기 전 오랫동안 레스토랑 알바를 하며, 불특정 다수의 ‘키즈'들에게 호되게 당해본 경험이 있는 나는 은밀하게 노키즈존을 바라 온 사람이었다. 오래되어 삐걱거리는 목재 복도를 우당탕탕 뛰어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손에 든 음료를 놓친 적도 있고, 바쁘게 스테이크를 서빙하다가 코너를 돌아 나오는 아이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급히 멈춰서는 바람에 예쁘게 플레이팅 된 스테이크가 미끄러져 바닥에 곤두박질친 적도 있다. 그때는 울고 싶은 마음과 함께 ‘아, 아이들이란 정말!’로 시작되는 다양한 편견과 선입견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어느새 아이들이 북적이는 장소에 방문할 때면 나도 모르게 긴장하게 되거나 직원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직업병이 생기기도 했다.


다난했던 레스토랑 알바를 그만두고 처음 취직한 직장은 사회적 가치 확산을 목표로 하는 콘텐츠 전문 회사였다. 그곳에서 나는 첫 프로젝트로 아동권리와 관련한 영상 캠페인에 투입되었다. 총 다섯 편으로 구성된 영상 캠페인을 모두 마치고 내가 처음으로 한 생각은 ‘내가 참 폭력적인 어른이었구나'하는 생각뿐이었다.


사실 은밀한 마음으로 노키즈존을 바라왔다고 해도 나는 아이들에게 관대한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있었을 뿐 아니라, 나이가 어리다고 반말부터 뱉고 보는 사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묻기 전에 답을 주려는 행동부터 아이들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어른들이 생각의 길을 내주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참 다양하게 아이들을 억압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쓸 놀이터를 왜 어른들의 관점으로만 기획하는지, 아이들과 관련한 정책에 왜 아이들의 의견은 쏙 빠져있는지, 아직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지 못 해 소리를 지르거나 넘어지는 아이들로 인해 고안된 노키즈존이 어찌하여 초등학생, 중학생의 행동까지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도 그때 처음 고민해보게 되었다.


첫 직장을 그만둔 후에도 나는 사회적 경제 조직에 몸 담고 있다. 수익창출 이전에 사회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는 이 영역은 다양한 직업병을 양산한다. 가령 AI 기술을 활용해 재활용품 수거 로봇을 만드는 기업을 알게 된 후, 친구들이랑 수다를 떨다가도 플라스틱 겉에 붙은 비닐을 꼼지락거리며 뗀다던가(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제대로 분리수거가 되지 않으면 재활용율이 낮아진다), 예술 작품이 프린트된 굿즈를 살펴보다가 익숙한 발달장애인 작가의 이름이 보이면 괜히 한 번 더 바라보게 되는 식이다. 보호 종료 청소년의 직업교육 및 사회화를 지원하는 기업에는 2년째 소액이나마 후원을 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모르는 새에 불쑥 생겨나는 직업병을 척도로 나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해보려고 노력한다. 사실 요즘은 페이퍼 워크가 절대적으로 많아져 행간과 자간을 병적으로 체크하는 직업병이 생겨 괴로움을 겪고 있기도 하다. 미시적인 업무에 과몰입하고 있다는 자각이 드는 어느 순간에는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듯한 느낌이 들어 업에 대한 ‘현타’를 느끼는 순간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나에게 생겨난 달가운 직업병을 부러 되짚어보곤 한다. 그게 괴로운 일상의 틈을 메워주어 나와 당신, 그리고 사회에 대한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기 때문이다.


아직 익숙치 않는 영역이기 때문에 많은 종사자들이 직업을 설명하기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그저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퉁쳐질 때도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단지 직업이 아닌 그 속의 숱한 업무들을 말미암아 만들어지는 직업병이 우리내의 삶을 단단하게 규정해주기도 한다는 점이다. 직업이라는 명사가 아닌, 직업병을 말미암은 동사들이 열어갈 작은 각도를 시시각각 목도하며 확신이 서지 않는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도 차분하게 마음을 쓸어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 달가운 직업병이 지금 이 순간에도 냉랭하고 혼란스러운 삶을 소소하게 데워주기에, 다시 큰 숨을 고르며 고요를 찾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두 비워낸 자리엔 취향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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