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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선 Aug 28. 2020

인생이란 어쩌면 뉘앙스를 배우다, 마침내 버리는 일

뉘앙스가 뭐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소선


밍크인지 큐트인지 여러 만화를 모아서 발간하는 간행물을 즐겨보던 11살 시절의 일이다. 당시 유행하는 만화를 보다가 여자 주인공과 그의 친구가 갈등을 빚은 에피소드를 본 적이 있다. 여자 주인공이 좋아하는 남자를 쟁취하기 위해 그의 친구가 근거없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 발단이었고, 심증에 이어 물증을 확보한 여자 주인공이 친구에게 사실확인을 하는 장면이 흥미롭게 이어졌다. 자신의 잘못이 명백히 밝혀지자 궁지에 몰린 친구는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걸로 하자. 됐지?’ 결국 여자 주인공은 내내 참아온 폭발적인 감정을 쏟아내고, 둘은 아주 심각한 갈등에 처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여자 주인공이었어도 아주 피가 거꾸로 솟았을 것이 자명하지만, 당시에는 어리둥절한 마음이 들었다. ‘내 말이 맞는 걸로 인정을 하겠다는 데 왜 화를 내는거지?’


나는 한동안 여자 주인공이 왜 화를 냈는지 이해하기 위해 골몰했다. 당시엔 결국 답을 찾지 못 해 어느 순간 잊어버렸지만, 이후 ‘뉘앙스’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종종 생각이 나곤 했다. '비꼰다'라는 뉘앙스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전무했으니 이해할 수 있을리 없었던 것이다.


뉘앙스. 프랑스어로 ‘음색, 명도, 채도, 색상, 어감 따위의 미묘한 차이. 또는 그런 차이에서 오는 느낌이나 인상’을 뜻하는 이 단어는 일상에서도 자주 쓰이는 말이다. 그리고 사회인 n년차가 된 나에게 있어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무기가 되어주는 핵심 역량이기도 다.(비꼬는 말투도 이해 못 하던 아이가 자라 갈등을 중재하기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각고의 노력이 있었는지)


사회생활 혹은 인간관계를 영위하다보면 이 미묘한 뉘앙스 때문에 울고 웃는 경우가 참 많다. 분명 칭찬의 워딩인데 그 뉘앙스가 묘하게 비꼬는 듯해 내내 의중을 곱씹어보게 된다던가, 평소와 같은 아침 인사인데 괜스레 격려를 받는 듯해 힘이 난다던가 하는 식이다. 말의 높낮이와 템포, 목소리의 무게와 표정의 변화 등 뉘앙스를 결정짓는 요소를 하나씩 알아가고 나름의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이 때론 센스있는 사회인으로 나아가는 길인 것 같아 골몰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뉘앙스를 파악하는 게 극도로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데이터를 방대하게 모아두고 나름의 필승 전략까지 세워뒀는데 그런 나의 지론을 뒤엎는 상황들이 종종 생기기 때문이다. 최근 ‘T와 F의 차이(MBTI)’를 주제로 회자되는 여러가지 상황이 그 방증이기도 하다. 똑같은 말을 똑같은 뉘앙스로 해도 누군가에게는 조언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다면 도대체 어쩌라는 말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나는 그 누구보다 뉘앙스에 민감한 사람으로서 격동의 7,8월을 보냈다. 관계에서 비롯된 심각한 갈등을 겪었으며, 그나마 덜 상처받을 수 있는 뉘앙스를 고민하느라 하루에도 수십번 써두었던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반복했다. 그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 내가 느낀 것은 누군가의 의도를 쉽게 까뒤집어 보지 않고, 말투보다 말 자체에 담길 메시지를 고르는데 시간을 쏟는 일 없이 대화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모적이고 일차원적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겉만 번지르르한 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간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쓴 것인지, 조금 후회스럽기도 했다. 메시지 자체에 자신이 없어서 그렇게 포장을 해왔나 싶기도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말투나 표정뿐만 아니라 생각과 철학이 점점 공고해짐을 느낀다. 무뚝뚝한 사람이 상냥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것은 점점 더 불가능한 일이 되어간다. 하지만 그것이 껍데기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알맹이의 문제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말투는 딱딱하고 어딘가 퉁명스럽더라도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이 담긴 사람이 뱉어내는 말의 뉘앙스는 결코 공격적이지 않다. 반대로 말하면 껍데기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을 먼저 헤아리는 사람에게 단편적인 뉘앙스는 더이상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여러가지 성장통을 겪고 있는 요즘, 나는 담백한 소통에 집중해보려 노력 중이다. 음절 사이에 습관적으로 달라붙는 과도한 친절은 조금 덜어내고, 단단한 철학을 기반으로한 나의 생각을 질박한 표현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매순간 뉘앙스를 커스텀하느라 골머리를 싸맬 일도, 누군가의 뉘앙스를 해석하느라 밤잠을 설칠 일도 없지 않을까. 딱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물 속을 휘적휘적 걷는 듯하던 발걸음이 마침내 뭍에 나온 듯 훨훨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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