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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선 May 19. 2020

나는 1년에 한 번씩 도망치고 싶어진다.

그저 역마살인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밑천이 바닥난 것이었음을


ⓒ소선


오늘은 세 번째 직장에 입사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한 달만 더 지나면 가장 오래 다닌 회사의 기록도 갱신될 것이다. 하지만 이 얼마나 얄궂은 일인지 이번에도 어김없이 찾아오고야 만 것이다. 당장 이직을 하지 않으면 이대로 가라앉아 영영 올라오지 못 할 것 같은 조바심이.


올해는 그 충동질이 예년과 달리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평소라면 늘 그렇듯 허허실실 넘어갔을 사수의 말에 울컥 짜증스러운 마음이 넘실대고, 굳이 상기하지 않아도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펼쳐지던 업무 리스트는 카카오톡에 빼곡히 써놓고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웃음소리를 안주삼아 꼴딱 삼키던 소주 한 잔도 어느새 쉬이 쓰지 않던 비속어 속으로 쓰게 흘러갔다. 그런 생활이 두어달 이어지니 ‘아, 이 일이 나랑 안 맞아서 이렇게 스트레스 받는건가?’하는 생각이 또 다시 솟구쳤다. ‘이직각'을 재야 하는 시기가 왔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 코로나19가 장기전에 접어든 탓에 취업시장은 얼어붙었고, 기존 직원들도 해고를 당하는 처지에 회사를 옮긴다는 건 너무나 위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노잼시기'는 더욱 격렬하게 몰아쳤다. 도망칠 곳이 없는 상황에서 불안정한 감정을 떠안고 지내는 시간은 마치 형벌처럼 무겁게 다가왔다. 끝이 없는 업무를 퀘스트 깨듯이 완수하다보면 후루룩 지나가던 하루가 비개인 처마 끝의 빗방울처럼 뚝뚝, 느리고 조용히 흘러가는 기분마저 들었다.


갈 곳은 없고, 사실 그렇다고 딱히 가고 싶은 회사도 없고.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이직을 한다고 해서 내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이직을 하고서도 꼭 1년이 되면 이직을 꿈꾸는 내 자신이 조금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뭘까, 뭐가 문제일까. 


그러다가 문득 뒤통수를 치고 지나가는 깨달음이 있었다. 반복되는 이직 충동이 시간적 기준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대략 1년 즈음이 됐을 때 내 밑천이 바닥을 드러내며 슬며시 고개를 든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일머리가 좋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것은 게으른 나에게 좋은 무기가 되어주었고, 작은 노력에도 그럴듯한 성과를 낼 수 있어 어지간하면 윤택한 인정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방종만을 거듭한 것은 아니다. 일정한 업무 범위에서 나는 내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스스로 아주 성실한 타입이라고는 말하지 못 하는, 그런 정도의 게으름이라는 말이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그럴듯한 인정을 보장받을 수 있는 시기가 딱 1년이라는 것. 그 사실을 세 번의 이직을 경험하고,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진 후에야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배워둔 스킬과 몇 번의 이직을 통해 간간히 업데이트 해 둔 역량이 이번의 1년을 지탱해주었지만, 밑천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고 그 때마다 어디선가 맞춤형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직을 해왔을 지 모른다는 깨달음.  


이 깨달음 이후 아주 무거운 솜이불을 덮은 듯 온 몸과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떠남으로써 새로운 길을 열어온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인생 업데이트’의 시기를 계속 유보해온 것이라면 그 공백기를 대체 어떻게 메워야 하나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 고민도 3일을 못 넘기더니 '어쩌겠나'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저 서른을 기념하여 거국적으로 맞이하는 퀘스트라고 생각할 수밖에!


그래도 다행이다. 그럭저럭 쌓아놓은 밑천으로 1년을 빌어먹는 사람이라니. ‘밑천이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업데이트를 미루지 않고 나아가다 보면 나중엔 수월히 3년도 버틸 수 있겠다!’라는 우스운 생각도 잠시 해보지만 다시 시작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이유를 알았으니, 이제는 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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