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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선 May 21. 2020

실은 나도 아이스크림이 너무 먹고 싶었어

근데 내 손에서 아이스크림을 뺏은 게 나더라고

ⓒ소선


우리 회사는 요즘 서울에서 제일 핫하다는 서울숲 인근에 위치해있다. 덕분에 멀리 나가지 않아도 온갖 인스타 맛집과 디저트 가게가 즐비하고, 후다닥 점심을 해치우고 나면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서울숲 산책도 가능하다.

 

그런 와중에 한 달 전쯤 젤라또 집이 하나 생겼다. 유행에 민감한 동료가 귀신같이 그 소식을 알아내었고, 언제 시간내서 같이 먹으러 가자는 말을 건넸다. ‘아, 너무 좋지!’라며 반색한 것이 무색하게 그런 뒤로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을 때, 우연찮은 기회로 드디어 젤라또를 먹으러 나섰다. 백향과에 딸기에 심지어 쌀맛이 나는 아이스크림들까지 온갖 맛이 즐비했다. 원하는 맛을 고르고 새끼손톱만한 숟가락으로 조심조심 떠먹으며 사무실로 돌아오는데 문득, 이렇게 여유롭게 회사 인근을 돌아다녀본 적이 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회사는 근무형태가 아주 자유롭다. 출근 시간은 대체로 10시에서 11시 사이(이것도 강제는 아니다)이며, 할 일만 다 끝낸다면 늦게 출근했다고 늦게 퇴근하란 법도 없다. 연차나 반차도 사정이 있다면 별도의 컨펌없이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입사 초반에는 ‘이렇게 해도 회사가 굴러간다고?’싶었지만 1년을 넘게 지켜본 결과, 잘만 돌아간다. 무질서한 듯 보이지만 분명한 질서가 있고,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책임감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밥먹고 졸린데 산책 다녀올 사람?’ 내지는 ‘요 앞에 새로운 빵집 생겼는데 원정 다녀올 분 구함’ 등의 제안이 나에게도 닿을 수 있는 종류의 말이라는 생각을 좀처럼 하지 못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혹시 나를 게으르다고 보거나 눈치없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다. 정작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들어오는 동료들을 보고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면서, 그냥 나는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아, 나는 급하게 해야할 일이 있어서’라는 말로 슬그머니 밀려났던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런 내 손에 들려있는 젤라또라니. 하늘은 더할나위 없이 화창하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두런두런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며 걷는 길은 한정없이 자유로웠다. 그러다가는 그동안 한 발 앞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실은 나도 아이스크림이 너무 먹고 싶었다. 사람들 따라 산책도 가고, 일이 안 되면 옥상에 누워 잠깐 잠도 자고, 그냥 그런 아무것도 아닌 일상들이 부러웠다. 그런데 그런 자유로움을 뺏은 것이 다름 아닌 나였다니. 나와 다른 이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라고 풀어줬는데, ‘어쩌면 폐가 될 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할 101가지 목록’을 혼자 만들어두고 그 체크박스를 덜덜거리는 손으로 짚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은 이런 저런 심경의 변화가 많아 정혜신 박사의 ‘당신이 옳다’를 찾아 읽고 있다. 그는 요즘 나의 변화를 가만히 다독여주는 일등공신이다. ‘심리적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 공급받아야 하는 산소같은 것이 있다. ‘당신이 옳다’는 확인이다.’라는 문장들로.


그날 내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은 ‘당신이 옳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은 알고 있는 노력과 떳떳함을 무기삼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도 된다는 한 컵의 위로였다. 이런 생각을 건너다니고 있는 요즘, 나는 새삼 내가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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