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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s Mar 16. 2023

죽음 너머로 네가 먼저 건너갔다

초월성

어렸을 때 애완용 거북이를 키운 적이 있다. 

등딱지가 어른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 할까 싶게 조그마한, 새끼 붉은귀거북.     


외래종 민물거북의 한 종류인 붉은귀거북은 한때 우리나라에서 애완동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대량 수입이 되어 누구나 동네 수족관과 마트에서 금붕어만큼이나 쉽게 '구입'할 수 있었고, 사월초파일이면 전국 각지에서 종교행사의 방생용 동물로도 각광받았다. 이 동물이 우리나라에서 생태계 교란종으로 지정되고 수입도 방생도 법적으로 금지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매일 먹이를 주고 물을 갈아주고 애지중지 살폈던 그 거북이의 죽음을 기억한다. 

새까만 검은깨 같던 작은 두 눈이 힘없이 감기고 앙증맞은 네 다리가 축 늘어져 있던, 죽음 특유의 이물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던 순간. 

가까이서 접한 첫 죽음이었다.     




동생과 할머니와 셋이서 거북이의 사체를 종이에 싸서, 아파트 화단의 나무 밑에 묻었다.   

할머니는 "거북아, 훨훨 날아서 바다로 가거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속으로 '우리 거북이는 민물에서 사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거북이가 건강하게 커서 넓은 물속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장면을 상상했다. 

민물거북에게 바다로 가라는 할머니의 말이, 이상하게도 오래오래 마음에 남았다. 따스하고 푸르게.     


나름 장례식 비슷하게 치러진, 내 인생의 첫 애도의 기억이다.           




입원해 있는 애기를 보러 매일 동물병원에 갔던 어느 날 저녁, 초등학생쯤 되는 어린 여자아이와 부모가 작은 

상자를 들고 병원을 방문했다. 나는 데스크 앞 대기실에서 면회 대기를 하고 있었는데, 얼마 후 수의사 면담을 하고 나오는 아이가 대성통곡을 하는 장면을 보았다. 햄스터가 죽은 모양이었다.     


나는 아이의 슬픔에 마음이 아픈 한편, 그 옆에서 귀가를 재촉하는 아이 부모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녀에게 아무런 위로의 말도 하지 않는 그 모습이.        


속으로 바랐다. 그들이 병원에서 보인 모습과는 달리, 집에 가서는 아이의 애도의 감정을 충분히 보듬어주고 이별의 경험을 잘 치르게 해 줬기를. 

'새 햄스터 사줄 테니 그만 울어.'라고 하지는 않았기를.       

  



2013.


“나는 어린 내 눈에 처음으로 죽음을 보았던 1974년의 봄을 아직 기억한다.” 

- 신해철, <날아라 병아리>      


삶 전체를 되돌아봤을 때 사진처럼, 정지화면처럼 두고두고 각인되는 어떤 순간들이 있다. 소중했거나, 고통스러웠거나, 중요했던 순간들이 그렇다.  

대개 죽음이나 이별의 장면이, 그러한 순간들에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진통제도 소용없는 췌장암의 통증과 싸우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꽉 닫힌 눈꺼풀. 

어린 거북이의 축 늘어진 고개와 사지.  

병원 치료대 위, 끝끝내 눈 감은 내 첫 고양이의 지친 몸뚱이.     


그런 순간들은 준엄한 목소리로 뭔가를 알려준다. 

너도 곧 그들처럼 될 거야. 우리는 모두 같은 운명이야. 

잊어버리지 마.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2009. 2017.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지레 내다봄으로써 죽음을 사유하고, 그럼으로써 항시 죽음을 자신 속에 간직하고, 드디어는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 김열규,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중에서     


집안 어른들과, 지인과, 지인의 부모와... 많은 이들의 장례에 참석해 왔고 앞으로 더 많이 참석할 것을 안다. 나 자신이 상주가 될 날이 올 것도 안다. 어느 날엔가는 나 또한 장례의 주인공이 될 것을 안다.

우리는 누구나 안다.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고, 죽음의 경고등은 늘 켜져 있으니까.   


그러나 내게 몹시 소중했던 생명체가 가르쳐준 건 그만큼 힘이 셌다. 한 마리의 고양이가 있는 힘껏 생을 살다가, 영문 모를 고통과 사투를 벌이고, 제 생명력을 다 소진하고 나자 그저 하나의 ‘사체’로 변환되던 모든 순간들을 목격하면서 비로소 생생히 알아졌다. 

고양이가 곧 나임을. 

네가 조금 먼저 건너간 그곳으로 나도 곧 가게 될 것임을.         

       



영화 <인터스텔라>에도 나온, 영국 시인 딜런 토마스의 시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를 떠올렸다. 


그곳으로 ‘순순히 gentle’ 건너가지 않고 싸웠던, 꺼져가는 생명의 빛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하악질’ 했던(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그러나 그 끝에 폴짝, 저 세상을 향해 가벼이 도약해 떠나버린 내 고양이의 모든 순간을 떠올렸다. 그 모든 순간은 내게 죽음을 각인시켰다.       


그러니 남은 삶에서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를 있는 힘껏 살아내다가, 별안간 찾아온, 벌이 아닌 고통과 싸우고, 그러다 다른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 것 외에는.  


고양이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죽음과 함께’ 살아간다.         


        

2018. 3.18. 떠나기 한 달 전.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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