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한 달에 평균 6-7회 정도의 구토가 있었던 데다, 밤새 먹은 것도 없다 보니 게워낸 것이라곤 투명한 액체뿐이었지만, 그런 날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요 며칠 부쩍 밥도 잘 안 먹고 기력도 없어 보이는 게 걱정스러워 주치의에게 전화를 하고 당일 진료 예약을 잡았다.
사람처럼 '응, 장염은 아닌 것 같고 조금 체한 정도인 것 같아.'와 같이 본인 상태를 직접 말해줄 수 없는 동물이기에,
밥을 안 먹거나 토하거나 소화기 문제가 있는 것 같을 땐 사실 모든 걸 살펴봐야 할 수밖에 없다.
결국 피검사부터 해서 신장, 췌장, 간장, 갑상선 수치까지 전부 다 검토하고 복부 초음파도 찍었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다.
정상범위에서 벗어난 수치들이 있었지만 아주 조금 벗어나 있을 뿐이라, 어떤 질병이나 질환의 징후를 찾을 순 없었다.
숫자들을 믿을 수는 없다. 숫자는 숫자일 뿐이다. 6년 전 애기가 죽기 보름 전에조차 어떤 숫자들은 '괜찮은'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내가 매달릴 수 있는 건 또다시 숫자들뿐이다. 그것이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구토를 억제해 주는 주사를 맞고 수액을 맞고, 항생제와 위장관보호제가 들어있는 내복약과 용량을 늘린 식욕촉진제를 처방받았다.
며칠 약을 먹이니 보리의 컨디션은 나아졌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안다. 이 '다행'은 더 이상 예전 같은 다행도 아닐 것이고, 그리 오래가지도 않을 것임을.
잘 줄어들지 않는 사료 그릇, 점점 줄어드는 식욕촉진제 급여 효과, 이것저것 바꿔줘도 새록새록 싫증 내는 간식 입맛, 그 어떤 장난감에도 심드렁한 눈빛.
'우다다' 달리는 소리도, 호기심 가득한 '채터링'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잠자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노령의 고양이와의 일상은 차분하고 조용하다.
이런 차분함 속에 불안과 다행이, 기쁨과 슬픔이, 오지 않은 미래와 천금 같은 현재가, 불완전한 비율로 뒤섞여 있다.
그래도 여전히 아기 같은 동그란 눈동자로 또랑또랑 나와 눈을 맞추는 모습에, 어리광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에, 새벽녘에 들리는 고릉고릉 코 고는 소리에, 아직은 토실토실한 뱃살에, 어쩌다 가끔 입에 맞았는지 바닥까지 비운 간식 그릇에, 겨우 애써 안심하고 또 하루를 연명한다.
그렇다.
아기 같은 내 고양이는 나이가 많은 것이다.
내 눈에 다섯 살배기 유치원생 같은 내 고양이는 사실은 요양원의 여든다섯 노인인 것이다.
2024. 4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이런 말은 그냥 인터넷용 관용어구 이상도 이하도 아닌 말이다. 현실을 속이는 달콤한 슈거코팅 같은 이 말은 사실은 아직 나이 들지 않은 이들이 자신을 위로하려고 억지로 지어낸 말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엄연히 연령대에 따른 발달단계와 발달과업이 있다. 특정 시기에 더 수월하고 그 시기를 놓치거나 거슬렀을 때 더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한 일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느낌들은 인생의 모든 시기를 아울러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느 특정 시기에만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느낌들과, 그 시기를 지나고 나면 현저히 퇴색되거나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느낌들도 있다.
늙은 고양이를 반려하고 있는 나라는 인간 역시 늙어가는 중이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심리상담사라는 일을 시작한 건 중년기 초입이었다. 늦깎이였다.
때문에 직업 발달단계상 현재 내가 거쳐가고 있는 단계는 아직은 청년기의 그것에 가깝다. 초심자 단계는 지났지만 그렇다고 원숙함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중간 상태. 아직 뭘 많이 쌓아야 하는 단계. 중년이라는 신체적, 물리적, 사회적 나이에 걸맞은 직업적 숙련됨이나 수입은 따라오지 않고, 그 대신 청년기에나 가능한 가열찬 에너지와 체력과 인지기능이 요구되는 단계. (그리고 적은 수입도)
중년의 내 몸과 두뇌는 이것들을 따라잡지 못한다. 몸이 마음을 못 따라가고 의지가 능력에 못 미친다.
늦게 시작해도 되는 일이라는 건 없다. 늦게 시작한 일엔 분명히 대가가 따른다. 그걸 싹 감추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라고 활짝 웃는 척할 뿐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보리의 활력과 체력과 식욕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니다.
보리는 자기 나이를 살고 있을 뿐이다.
열네 살 반의 고양이는 덜 먹고 덜 움직이고 호기심도 덜하고 잠은 많이 잔다. 5년 전처럼, 10년 전처럼 천방지축 똥꼬발랄하길 바랄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