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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내음 Apr 06. 2016

보는 것이 믿는 것일까?

01. 나를 찾아줘 (Gone Girl, 2014)

 굉장히 수다스럽지는 않지만 생각할 거리를 툭툭 던져주며 많은 이야기를 하는 친구가 있다. 친구와 헤어지는 길엔 늘 생각이 많아져 집에 와 일기를 꼭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런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듯한 기분이다. 영화 '나를 찾아줘'를 보고 나서 나는 일기장을 펼쳐 머리에 떠오른 모든 활자들을 나열했다. 끝도 없이 써 내려갈 수 있는 기분이었다. 며칠이 지나 그 분주했던 마음은 사라졌지만 꼽아놓은 주요 질문들에 논해보려 한다. 


우리에게 미디어란 무엇인가?


 아마 이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 중 다수는 즉각적으로 미디어에 대해 생각해 봤을 것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이 영화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내내 '미디어'에 대해 생각해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듯 끊임없이 미디어를 노출시켰다. 영화의 주요 이야기 축인 사라진 아내를 찾는 과정은 끊임없이 미디어를 통해 진행된다. 아내를 죽인 비정한 남편이 본인의 과오를 담담히 인정하는 진솔한 사내로 반전할 수 있었던 계기도 미디어였다. 아내의 부모, 남편의 내연녀, 그리고 사라진 아내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상대에게 전달하는 방식 모두 미디어를 통해서였다.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미디어는 대중 미디어의 총아, 텔레비전이었다. 마치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 것처럼 전원만 켜면 영상이 끊임없이 나오는 텔레비전은 그만큼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매체다. 컴퓨터와 모바일 매체가 물론 그 영향력을 더해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개별 단위 가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활용해 소비하는 매체는 분명 텔레비전이다. 영화의 주인공들 역시 텔레비전의 이러한 위상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 영향력을 최대한 자기편으로 이용하기 위해 안달한다.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영상은 신문에 등장하는 기사와는 사뭇 다르다. 어떤 장면을 보여줌에 있어서 기자에 따라 다른 묘사가 가능한 신문 기사와는 달리 텔레비전은 카메라로 그 장면을 찍어 어떤 채널에서든지 (물론 어떤 각도에서 보여주느냐에 따라 디테일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거의 동일한 영상을 송출한다. 이 특징이 오늘날 텔레비전이 가지고 있는 위상과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영상은 기사의 단어처럼 조작될 수 없으며 따라서 텔레비전은 객관적이라는 믿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텔레비전의 위상 때문에 영화의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하려 애쓴다. 경찰은 텔레비전을 통한 공개수사로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쥐려 한다. 살인범으로 의심받던 남편은 본인의 결백을 위해 토크쇼를 나가고, 남편의 내연녀는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광기 어린 스토커의 피해자로 변신한 아내는 수많은 카메라가 상주하고 있던 집 앞에서 피로 물든 자신의 처절한 희생을 전국에 방영시킨다. 행복한 부부를 보여주고 싶었던 마지막 순간에도 아내는 집으로 토크쇼를 초대한다. 텔레비전에 모습을 내보인다는 것, 그것은 사회적으로 '이것이 진실입니다'를 객관적으로 인증받는 중요한 절차인 것이다. 

 

 그러나 텔레비전이 그러한 객관적 진실성을 실제로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또한 영화는 끊임없이 보여준다. 카메라 뒤에 숨겨진 진실은 카메라를 통해 얼마나 다르게 가공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것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장면은 남편의 토크쇼였다. 토크쇼를 타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의 여동생은 이렇게 말한다. 토크쇼에서 오빠는 정말 최고였다고, 이제 사람들은 오빠 편이 될 거라고. 이 장면만으로도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며 신앙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던 텔레비전이 얼마나 허술하게 가공된 객관적 진실을 카메라로 담아낼 수 있는지는 분명하다. 그리고 그 점을 영화는 짚어주고 있다. 


 미디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보면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일반적인 미디어에 대한 인식 역시 미디어란 무릇 메시지를 담는 그릇이라 동의되어 있다. 그런데 정말 미디어란 단순한 그릇에 불과한 것일까? 


 맥루헌은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다'라고 역설한 바 있다. 이 말은 동일 콘텐츠라도 어떤 미디어에 담기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맥락은 다소 다르지만 그런 점에서 영화에서 텔레비전의 위상은 미디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을 보여준다. 텔레비전 자체가 메시지가 되는 순간이다. 남편의 결백은 텔레비전에 등장해야만 공인될 수 있으며 아내가 성폭행 피해자라는 내용은 텔레비전에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의심받을 수 없는 진실로 안착된다. 


 그래서인가.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텔레비전의 내용을 의심하려 하지 않는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앵커가 전해주는 뉴스가 실은 틀린 정보일 수도 있다고, 토크쇼에 나와 이야기하는 스타의 고백이 실은 거짓말일 수도 있다고 우리는 의심해 본 적이 있었던가? 미디어의 힘은 우리가 가진 미디어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텔레비전의 영상이 항상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우리의 절대적 믿음 자체부터 한 번쯤 의심해 봐야 하는 순간이다. 


오늘도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수많은 진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던가요? 


 I love you just as you are. 해석해보면 '나는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합니다' 정도다. 해석도 쉬운 이 팝송 가사는 정말 현실에서 쉬이 일어나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 영화에서만큼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부부의 처음은 결말처럼 비극적이지는 않다. 억지웃음을 지으며 토크쇼에서 거짓 행복을 보여줘야 했던 부부에게도 노력하지 않아도 한없이 사랑이 넘치던 때가 있었다. 상대의 농담, 상대의 옷차림, 상대가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이 모두 내가 꿈꾸던 것처럼 완벽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달콤했던 꿈은 오래가지 않는다. 상대가 돌변한 것이다.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다. 대체 왜? 그건 상대방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말한다. 중요한 건 상황이 아니라 우리라고, 우리에게 집중하자고. 아내는 알고 있었다. 남편이 원하는 여자는 쿨한 여자라고. 그래서 아내는 노력했다고 고백한다. 당신이 원하는 쿨한 여자로 살아왔다고.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벌한다. 당신이 원하는 쿨한 여자로 살아온 나에게 이렇게 노력하지 않는 너를 벌하겠다고. 


"나는 당신을 위해 사람도 죽였어. 이런 아내가 어디있어?"

                                                                                                   <사진 출처 : www.naver.com>

 

 사랑의 비극은 어디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가장 많을까. 여론조사를 돌려 본 적은 없겠지만 사람들은 분명 상대에게서 정답을 찾으려 애쓰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갑자기 변했다고, 그 혹은 그녀는 내가 사랑하던 그 사람이 아니라고. 물론 그런 경우가 완전히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그보다 더 흔한 경우는 어쩌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랑을 상대에게 입혀놓고 그 모습을 사랑했던 게 아닐까. 자신에게 맞지 않는 상대방의 이상적인 사랑은 그만 벗겠다고, 이제 원래 입고 있던 제 옷을 입겠다고 상대가 나서는 순간 꿈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누군가 좋아지면 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어 진다. 상대가 듣고 싶은 말, 상대가 좋아할 만한 옷, 상대가 사랑하는 스킨십까지. 그게 설령 내게 어색한 일이라도 망설여지지 않는다. 그래야 나를 사랑해 줄 거라 믿으니 말이다. 정말 운이 좋아 어색했던 그 일이 실은 내 맘에도 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액션 영화를 보고 싶어 죽겠던 남자가 갑자기 로맨틱 코미디만 매일 보자니 좀이 쑤시는 경우가 더 허다할 것이다. 


 상대방이 변한 것은 없다. 그는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그래서 사랑을 시작할 때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 맞추지 말라고. 나는 그저 너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나를 위해 너를 감추지 말라고.  



어떤 모습이 진짜 나일까?


 아내는 남편을 살인자로 함정에 빠트린 뒤 머리를 염색하고 안경을 쓰고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며 낯선 곳으로 향한다. 얼마 뒤 옛 친구를 만난 아내에게 친구는 말한다. 그건 너답지 않아. 원래의 네 모습으로 돌아와. 아내는 다시 안경을 벗고 금발의 세련된 여자로 돌아온다. 


 패러디로 풍자되는 영화 대사가 있다. 나답지 않다고? 어떤 게 나다운 건데? 우스꽝스러운 개그 프로가 아니고 정말 진지한 상황에서 저 대사를 다시 읽어보자. 정말 나다운 건 뭐일까? 내가 나에 대해 생각한 시간이 있었던가?


 우리는 종종 나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서 해답을 얻는 경우가 많다. 넌 이런 사람이야, 저런 사람이야. 나를 바라볼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래 나는 그런 사람이구나 생각한 순간이 꽤 있을 것이다. 그렇구나, 저 사람들이 내가 보지 못하는 내 모습도 봤구나 감탄까지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한 점이 있다. 나는 정말 내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줬던가.


 다시 텔레비전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은 왜 텔레비전에 나오는 쇼윈도 부부의 거짓말에 늘 속는 것일까. 얼마 전에는 한 여배우가 거짓 모성애 논란에 휘말리며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했었다. 왜 우리는 미처 그녀의 모습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의심해 보지 않았을까.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보는 것을 꼭 믿을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보이지 않는 것까지 믿어보라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본다.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는 것은 수월치 않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가는 과정 역시 같다. 내가 보여주길 허락한 내 모습만 사람들은 볼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얼마든지 내가 보여주고 싶은 나만 솎아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매체를 통해 나를 가공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나는 왜 나를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것일까. 그냥 원래의 나로 넋 놓고 살아가면 안 되는 것일까.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말든 상관없이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러기엔 세상인심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것 같다. 이른바 자기 PR시대라고, 넌 너의 모습을 좀 더 좋게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사람들은 네가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하지 않고 네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에 더 관심이 많다고. 결정적으로 너를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보기에 세상은 바쁘다고. 예전 내 상사는 이렇게도 말했었다. "네가 똑똑한 지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똑똑해 보이는 게 더 중요하지."


 사라진 그녀, Gone Girl이라는 원제를 '나를 찾아줘'로 번역한 번역자는 참 번역을 잘한 것 같다. 쇼윈도 부부와 사랑의 변색, 그리고 미디어의 거짓말들로 꽉 채워진 이 영화는 결국 '나'를 찾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정말 '나'에 대해 잘 정의할 수 있는지, 그리고 진짜 나를 찾기 위한 시도를 했었는지, 영화는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를 찾는 과정. 거창한 듯 보이지만 그냥 내버려 두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영원히 불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타고 계속 변하는 나이기에 말이다. 어쩌면 매일 거울을 보면서 확인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계속 변하고 있는 진실한 나를 확인하기 위해 


르네 마그리트 'La Reproduction Inter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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