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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내음 Apr 18. 2016

무엇이 사랑을 가능케 하는가

02. 그녀 (Her, 2013)

지금, 사랑하고 있나요? 

눈을 뜨고,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땅을 걷는다.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대화를 하고, 웃음을 나누고, 입을 맞춘다.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인가. 보고 싶다 말하고, 추억을 공유하고, 언제든 '사랑한다' 말한다.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테다.


사랑. 세상 모든 사람들이 수없이 말하고 그만큼 간절히 듣기를 원하는 말. 나는 과연 언제 마지막으로 사랑을 보았던가 자문해본다. 상대의 고백에 들떴던 밤, 수없이 연습하던 우리의 우연, 돌아가지 못할 만큼 빛났던 너와 함께 한 청춘의 발자국들. 내가 기억하는 사랑의 모습들이다. 기다리다 지쳐 돌아가곤 했던 길, 차마 말할 수 없어 미뤘던 고백들, 털썩 주저앉아 흐려졌던 신호등.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랑의 모습들도 있다. 


그렇다.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영화다. 세상 모든 영화가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아니, 이 영화가 바로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우리가 모두 겪었지만 우리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사랑의 뒷모습을 이 영화는 우리에게 노래하고 있다고. 


어느 날, 당신의 사랑이 말을 걸다.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알랭 드 보통의 책을 펼쳤을지 모른다. 일단 나는 그러했다. 내가 시작했고 나만 알고 있는 이 감정을 왜 내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책을 펼치고 내 사랑의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읽고 또 읽으면 내 사랑을 헤아릴 수 있을 거야, 걷고 또 걸어 삶의 무게를 헤아려가는 순례자처럼 나는 책을 읽어나갔다. 그와 그녀의 이야기에 나와 너의 이야기를 덧칠한다. 수많은 멈춤과 낙서와 밑줄이 더해지며 책은 나만의 책이 되어가고 있는데도 내 사랑의 이유가 도통 보이질 않는다. 


테오도르에게 친구들이 묻는다. 사만다를 사랑하는 이유가 뭐야. 대답은 분명하다. 사만다는 단조롭지 않아. 누군가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왜 사랑하나요? 테오도르만큼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멈칫했다면, 무언지 떠올려 볼 시간이 필요했다면, 그 마음이 더 이해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테오도르처럼 자신이 왜 사랑하는지를 뚜렷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 그는 나를 행복하게 해줘요, 그녀의 미소가 아름다워요, 그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줘요, 그녀는 한결같이 친절해요. 하지만 왜 사랑이 시작되고 계속 이어지고 있는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을 거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건 분명해요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나와 비슷한 사람들.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어


사랑이란 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사고 같은 것 아니겠느냐

한 영화감독의 말이 인상 깊어 노트 한 구석에 적어두었다. 그래, 어느 날 찾아온 사고를 내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랑의 이유는 그만 뒤젂이기로 하였다. 온전히 나를 내려놓고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애쓸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데 이유가 무엇인들 어떻겠는가. 그리고 그 이유를 굳이 알아낼 필요는 또 무엇이겠는가. 어쩌면 애초에 이유 같은 건 없는 것인데 기어이 확인하고 말아야 마음이 편해지는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찾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라고 말할 수 있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순간들이 쌓여야만 하는 걸까. 잠드려는 테오도르에게 전화를 걸고 미안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사만다가 말한다. 잠들었다 깨도 사만다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일일이 대꾸해주고 언제든 너의 이야기는 듣고 싶으니 말해달라고 테오도르도 대꾸한다. 그런 밤들이 지나가고 '우리'는 성립되어 간다. 솜털 하나처럼 위태롭던 사랑이 견고해져 손으로도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순간,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 


'사랑은 아무나 하나, 눈이라도 마주쳐야지.' 유행가의 가사처럼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너를 사랑하는 나, 그리고 나를 볼 수 있는 너, 게다가 나를 또한 사랑하는 너까지 더해져야 한다. 사랑의 조건은 바로 이렇게 세 가지. 나, 너, 그리고 나와 네가 공존할 수 있는 시공간. 사랑의 조건은 단순하지만 이처럼 어려운 조건 세 가지가 또 어디 있을까. 그래서 난 아래의 노랫말이 참 좋다. 


이 넓은 세상위에 그 길고 긴 시간 속에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그대만을 사랑해

- 이승환, 화려하지 않은 고백 


내가 쓰지 않는 나의 편지는 과연 무엇일까


테오도르는 대필 편지 작가다. 고객의 사연들을 토대로 사진 속 뻐드렁니까지 일일이 확인해가며 사랑 편지를 쓴다. 그는 하루에도 여러 개의 추억을 기록해 보지만 정작 자신의 추억은 없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자신의 언어로 기록하는 시간, 테오도르의 일상은 모순적이게도 제 것이 될 수 없다. 


그런 테오도르에게 '진짜'라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특별할 것이다. 진짜 내 것. 진짜 내 사람. 인공 지능인 사만다에게 사랑에 빠진 것은 그것이 바로 그의 '진짜'이기 때문이었다. 사만다가 제3의 여인을 빌어 테오도르와 사랑을 나누고자 했던 시도는 그래서 더더욱 그에게는 마음 아픈 시간이었을 것이다. 대필 편지를 매일 쓰는 그가 사만다가 보낸 대필 편지를 읽은 셈이다. 


하지만 사만다에게 중요했던 건 가짜 몸을 빌려서라도 테오도르와 함께 하고 싶은 물리적 사랑이었다. 부족할 것 없다 테오도르가 말해줘도 소용없었다. 사만다는 남들의 사랑과 비교해 볼 때 부족하지 않은 사랑을 채워주고 싶었다. 인공지능과 사람이 하는 특별한 사랑도 결국 사람과 사람이 하는 보편적인 사랑의 소통방식을 따라가려고 애쓴 것이다. 그건 테오도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수천 명의 사람과 이야기하고 수백 명을 사랑할 수 있는 사만다를 인간의 관점에서 비난하며 슬퍼하였다. 


수십 억의 인구가 하는 사랑은 저마다 다른 풍경일 것이다. 하물며 인공지능과 사람이 하는 사랑 역시 다른 풍경이 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몰랐을까. 아니다. 몰라서가 아니다. 인정할 수 없어서이다. 우리의 사랑이 남들의 사랑과 다른 모습으로 흘러갈 때, 우리의 사랑이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사랑의 범위를 벗어날 때 우리는 불안감을 느끼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라고 정의한다. 사랑의 다른 변주구나 생각하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진짜 감정을 감당하지 못한다며 힐난하던 테오도르의 전 부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 테오도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내의 상을 자신에게 강요했다며 이 사랑의 어긋남은 결국 당신의 탓이라고 몰아 부친다. 시간이 지나면 나무의 결이 달라지듯 시간이 지나며 사랑의 결도 달라졌을 텐데, 아마도 테오도르와 아내는 둘 다 사랑의 변주를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뒤늦게 사만다와 이별을 경험하며 테오도르는 아내와의 사랑을 뒤돌아 보게 된다. 


사랑의 변주를 들을 수 있을까


어떤 사랑을 꿈꾸는가?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사만다와 테오도르의 사랑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내가 꿈꿔왔던 사랑이란 어떤 모습이었을까? 생각보다 쉽게 대답이 나온다. 아니, 난 저런 사랑을 원하지 않아. 감당해 낼 자신도 없고.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처음 혼자 살아보는 경험을 했다. 그때 알았다. 내가 얼마나 집이라는 것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이었는지를. 그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신문을 구독했다. 아침마다 신문이 털썩 놓여 있는 대문을 고스란히 가져오고 싶어서였다. 신문에 닿아있는 새벽의 차가운 축축함, 무심하게 던지고 가버린 배달원의 손 자취, 그리고 매일 만지게 되는 신문의 체취까지. 별 거 아닌 듯하지만 나는 구체적인 것을 소유하는 데 익숙한 사람임을 보여준다. 소유에 익숙해진 내게 많은 것을 내려놓는 그들의 사랑은 그저 꿈처럼 아득하다. 그래서 더 뭉클하며 보았던 영화라고 고백한다면 모순인 걸까


그래, 나는 사랑이 극대화되는 순간 소유하려고 애쓰는 그저 보통 사람이었다. 그러지 않다고 멋지게 꾸미고 싶어도 어쩌겠는가. 소유하려 애쓰다 있는 그대로를 내버려두지 못하는 나에게 이 영화는 이상 그 자체다. 


덧붙여, 영화에 나오는 디지털 시대의 단상에 대해 정말 저런 날들이 온다면 참 쓸쓸할 것 같다 말한다면 나는 이제 지나가 버린 시대의 사람으로 밀려나는 것일까. 그래도 ON 버튼 하나로 모든 것이 구현되는 그런 일상을 감당해 낼 것 같지는 못하다. 대필 편지 역시 마찬가지다. 


[사진 출처] 

http://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101950

http://www.nyculturebeat.com/index.php?document_srl=2974678&mid=Film

http://m.blog.naver.com/adcdvd/220015858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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