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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내음 May 04. 2016

여섯 번째 편지

너의 존재가 오롯이 드러났던 만삭 사진 

사랑하는 나의 딸, 도담이에게


지난주에 엄마는 아주 오랜만에 친구들과 봄소풍을 다녀왔어. 네가 깨기 전에 집을 나서서 네가 잠들고 나서야 집에 도착했으니 말 그대로 하루 종일 봄소풍을 즐기고 왔단다. 다행히도 큰 탈 없이 아빠와 너는 둘만의 소중한 하루를 보냈다고 들었어. 이번이 물론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제 너를 떼놓고도 엄마가 엄마의 하루를 즐길 수 있는 일상이 가능하다 생각하니 아주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서운하네. 엄마 마음은 다 이런가 봐.


그래도 네가 별 탈 없이 엄마를 보내주는 덕에 엄마는 친구들과 미술관도 다녀오고 봄길도 걸었지. 네가 태어나기 전에는 참 많이 걸었던 길이었는데도 이번엔 가니 새로운 길로 보이더라. 마치 정말 처음 걷는 길처럼 하나하나 새로운 빛 아래 나무들이 푸른 잎을 흔들며 유일한 그 날의 풍경을 보여주는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시간 동안은 너와 아빠를 잠시 잊고 걸었어. 엄마도 엄마만을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니깐.


때마침 미술관에서는 계절에 관한 전시를 하고 있어서 엄마는 걷는 길 말고 미술관에서도 봄을 찾을 수 있었단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모두 전시되어 있는 공간 속에서 엄마는 봄을 찍어왔어. 느껴봐. 여리여리하지만 부드럽게 타오르는 봄이 이 그림 속에 있는 것 같지 않니?


<나무>, 이대원


엄마는 봄에 태어나서 그런지 어떤 계절보다도 봄이 좋아. 특히 나무에 제각각 색이 더해지는 딱 이맘때의 봄이 좋단다. 너는 여름에 태어났으니 여름을 제일 좋아하려나 궁금하네. 여름에는 나무가 빼곡히 우거져서 그만큼의 운치도 차오르거든. 특히 소나기가 오는 날의 분위기는 가히 예술인데 여름 생인 너에게는 어떤 의미가 생기려는지 모르겠다. 


방금 말한 것처럼 도담아, 너는 여름에 태어난 아가란다. 이제 막 찜통더위가 시작되려는 때 네가 태어났지. 임산부는 몸이 무거워서 실제 날씨보다도 더 더운 날을 보내는데 그래서인지 엄마는 너와 만삭 사진을 찍으러 갔을 때를 한여름으로 기억하고 있더라고. 지금 보니 거의 초여름이었는데 말이지. 


봄이 되어서야 나무에 색이 입혀지고 여름에 그 색의 농도가 풍부해지는 것처럼 봄에 제법 임산부 태가 나기 시작하던 엄마는 여름으로 들어가려는 길목이 되자 자연스럽게 허리와 배에 손을 가져갈 만큼 꽉 차오른 임산부가 되었지. 그때를 가리켜 만삭이라는 말을 쓴단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특별한 때에 만삭 사진을 찍지. 사실 엄마는 처음에 만삭 사진을 찍을 생각은 하지 못했어. 실제로 사진을 찍어야 하는 날 아침에 그래 가보자 하며 아빠와 함께 스튜디오로 향했을 정도이니, 만삭 사진의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지. 고백하자면 엄마는 그저 산후조리원에서 얻은 만삭 사진 쿠폰이 좀 아깝다 생각하며 사진을 찍으러 갔었어.


스튜디오에 도착하니 컨셉을 정하라 하고 옷을 고르라 하고 이렇게 서보라 저렇게 앉아보라 주문이 많더구나. 귀찮다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고생이 전혀 없는 작업은 아니었어. 사진 찍는 것에는 영 취미와 적성이 따라주지 않는 엄마였지만 사진사 선생님의 말을 잘 들으며 빠르게 사진 작업을 끝냈지. 잠시 앉아 숨을 고르며 기다리니 사진을 확인하라고 했어. 


그리고 기적이 시작되었지. 


세상에, 만삭 사진이란 게 이렇게 예쁜 사진이구나. 이렇게 특별한 사진이구나. 정말 찍지 않았으면 후회할 뻔했구나. 감탄이 절로 나오는 사진들을 보면서 아빠와 나는 목이 빠져라 화면 속 사진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단다. 만삭 사진에 반해버린 우리는 그 자리에서 네 성장앨범까지 예약하고 나왔으니 이렇게 얼빠진 부모는 요즘 말로 역시 호갱님이라 불릴 만 하단 말이지.


호갱이든 뭐든 상관없이 우리는 사진이 줄 수 있는 특별한 매력에 그 날 푹 빠져 버리고 말았어. 좋은 사진사가 찍어줘서도 아니고, 모델인 우리 부부가 잘 찍어서도 아니야. 특별한 매력은 바로 너로부터 나오지. 너와 함께하는 그 찰나의 순간이 기록된다는 매력 말이야. 다시는 재현할 수 없는 그 순간만의 특별함. 엄마는 정말이지 그때 만삭 사진을 찍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단다. 그랬다면 우리 집엔 너의 순간순간이 덜 기록되어 있을 테니 추억도 그만큼 빠져 있었으려나.


생애 단 한 번밖에 찍을 수 없는 너의 만삭 사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순간을 이제 사진에서나마 찾으며 엄마는 다시 한 번 행복했던 기억을 불러본단다. 사진을 다 찍고 나와서 아빠와 사진을 다시 보며 신나게 수다를 떨었던 일까지 다 기억해 둘게. 비록 너는 그 순간이 기억나진 않겠지만 분명 너도 우리와 그 순간을 함께 보냈단다. 


봐봐. 풍선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 엄마 뱃속에 바로 네가 있었어. 다소 비좁았을 양수 속에서 온 몸을 웅크린 채 네가 놀고 있었단다. 가끔 너는 너의 배꼽과 엄마 배꼽을 차례로 누르며 웃곤 하지. 그래, 바로 그 배꼽을 통해 우리는 함께 숨을 쉬고 음악을 듣고 음식도 먹었단다. 설마 뱃속에서의 시간이 생각나서 자꾸 누르는 건 아니겠지?


이제 봄이 한 달 더 머무르면 머잖아 너와 사진을 찍었던 초여름이 돌아오겠구나. 계절이 돌고 돌아 또 봄과 초여름이 해마다 돌아오겠지. 엄마와 너는 해마다 돌아오는 초여름에 만삭 사진 말고 이제 또 어떤 사진들을 찍게 될까 벌써부터 궁금하고 설렌다. 사진 속의 장소와 우리의 표정은 해마다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알아두렴. 그 사진 속의 장면이 영원한 시간 속의 유일한 한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라는 말 속에 네가 있음을 확인했던 만삭 사진을 들여다보며

엄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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