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근무의 사연... 그리고 사라진 꽃들
사랑하는 나의 딸, 도담이에게
지난번 편지에 이어 다섯 번째 편지를 금세 쓸 줄 알았는데 너에게 인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네. 지난주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아서인지 엄마의 마음도 덩달아 바빠 편지 쓸 여유가 없었거든. 일단 너와 함께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갔었지. 꽤 오랫동안 지방에 내려와 지내던 중이라 그런지 엄마는 서울에서 마음의 봄을 맞이하고 있더라. 정작 지금 지내는 곳에서 개나리와 목련은 더 많이 볼 수 있는데 말이지. 홍대, 광화문, 삼성동 등에서 예전의 봄까지 기억하느라 정신이 없다가 수요일이 되었지. 우리 딸 손을 잡고 투표소에 들러 소중한 한 표의 권리도 행사하고 나니 다시 주말이 돌아왔어. 그리고 비가 왔지.
지난주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엄마는 봄비를 좋아하는데도 그 비가 참 길게 온다 생각했단다. 정말 긴 하루였지. 그래서 비도 길게 왔나 봐. 긴 하루에 이어 긴 밤을 보내고 나니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들어선 것 같았단다. 그럴 땐 무엇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더라.
2년 전에, 그러니깐 엄마가 우리 도담이와 아직 눈인사를 하지 못하던 그때에도 종일 비가 왔던 것 같아. 종일 오지 않았더라도 사람들 마음에는 비가 내렸으니 종일 비가 온 게 맞을 거야.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지. 우리 딸도 매년 듣게 될 단어가 되겠구나. 세월호. 수많은 꽃들이 비와 함께 지던 날이었지.
사실 엄마는 그 일이 생생히 기억나진 않아. 엄마는 당시에 뉴스를 거의 보지 않았거든. TV를 틀면 거의 모든 채널에서 세월호 소식을 전해주고 있어서 TV도 잘 켜지 않았어. 왜냐하면 엄마는 너를 뱃속에 품고 있던 중이었거든. 모두들 엄마에게 TV를 보지 말라고 했지.
보지 않아도 들리더라. 꽃들이 지고 있다고. 사람들이 떠나갔다고. 그때도 마음에 허기가 들었던 것 같아. 무엇으로 채워야 좋을지 모르는 허기 말이야. 좋아하는 호박 부침개를 연신 해서 먹어도 정말 그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던 것 같아.
마음이 아팠어. 얼굴도 처음 보는 사람들의 일에 그렇게 마음이 아프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단다. 그만큼 불행했던 일이지. 뉴스도 꽤 오래 세월호 소식을 전해주었던 것 같아. 오랫동안 뉴스를 보지 않았거든.
세월호 사고가 있던 날 며칠 후부터 엄마는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어. 출혈이 있었단다. 대량의 출혈은 아니었지만 놀라기엔 충분한 일이었지. 엄마와 아빠는 산부인과에 가서 너의 심장 박동 소리도 확인하고 여러 검사를 하며 출혈의 원인을 찾으려 했지. 그런데 결국 원인미상.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단다. 다행히도 두 차례의 소동 끝에 더 이상의 출혈은 없었지만 모두의 걱정을 얻게 되었어. 길지 않은 출퇴근 거리도 걱정되어 결국 재택근무 전환이 이루어졌단다.
동료들의 책상이 보이지 않고 혼자 식탁에 앉아 보고서를 쓰는 느낌이란 과히 나쁘지 않더라. 원할 때 잠시 누워있을 수도 있고, 또 컴퓨터 옆에 냄새나는 음식을 가져다 놓아도 눈치 볼 사람도 없고. 처음에는 재택근무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가 나중에는 밀린 보고서를 처리하느라 만삭의 임산부가 새벽까지 꼼짝없이 식탁에 붙잡혀 있었단다. 당시에 아빠가 퇴근하면서 매일 화내던 게 아직도 기억나. 일 좀 그만하라고 잔소리 세례였지.
여하튼 그렇게 재택근무는 시작되었고, 1주일에 한 번씩 사무실에 돌아가 진행 경과를 보고하곤 했어. 엄마와 친했던 동료 아줌마와도 1주일에 한 번씩은 수다를 떨었지. 배가 점점 부풀어갈수록 심각했던 출혈의 공포는 기억 끝으로 밀려갔어. 보고서 마감이 되지 않았다며 네가 출산일 이후에 나왔으면 하는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어.
작았던 거야. 놀라기엔 충분했지만 잊고 지낼 만큼 작았던 거야. 다행히도 너는 무사했거든.
그런데 2년이나 지나도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이 있어. 잊고 지낼 수 없을 만큼 작지 않은 비극이지. 그래서 올해도 그 날이 오자 하늘에서 비가 내렸나 봐. 계속 잊지 말고 꽃들을 기억해 달라고 말이야.
외할머니 댁에 들어서면 보이는 저 리본 말이야. 언젠가 너도 노란 리본에 대해 물어보겠지. 도대체 뭘 잊지 않겠다고 붙여 놓은 스티커냐고. 이건 대체 무슨 의미냐고. 그때 너에게 2년 전 비극에 대해 말해줄 수 있을 거야. 물론 그때에도 네가 그 비극을 이해할 만큼 충분히 커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주말에 엄마는 아빠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 세월호를 떠올리면 사실 잘 떠오르는 생생한 기억이 없다고. 뱃 속에 있는 네가 놀랄까 봐 많이 미뤄두었던 기억. 이제 우리가 함께 커나가면서 다시는 저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함께 기억해나가자.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꽃들에게는 어떤 꿈이 있었을까. 이제 막 엄마라는 이름에 대해 걸음마를 시작한 내가 돌아오지 못한 꽃들의 부모 마음까지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같이 울어줄 수는 있을 것 같아. 아직 기억하고 있다고, 아주 오랫동안 누군가의 엄마라는 이름으로 계속 기억해 나갈 거라고
도담아. 앞으로 너에게 펼쳐질 시간 동안 좋은 일도 또 나쁜 일도 참 많을 거야.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너는 어떤 기억들을 가지게 될지 궁금하다. 너에게 중요한 일, 그리고 꼭 네 일이 아니었더라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이라면 꼭 기억해두며 살아가길 바랄게.
잊지 않아야 할 꽃들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시를 지었어. 아직 기다리고 있을 부모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고 싶어 적어본 글자들. 시에 담긴 엄마의 마음도 우리 도담이가 헤아릴 수 있는 날을 기다릴게.
행복한 기억이 한 층 포개지는 오늘을 바라며,
엄마로부터
개화
길고 긴 밤이 지난다
밝은 낮이 기다릴 줄 알았는데
다시 밤이 시작된다
검은 비가 내린다
다시 밤이다
꽃은 언제 피려나
펴보지도 못한 꽃망울들이
비에 씻겨 내려간다
후드득 후드득
비가 오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꽃망울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꽃은 언제 피려나
다시 밤이 온다
검은 비가 멎어가자
길고 긴 밤이 온다
사방의 울음을 포개가며
채 감지 못한 눈들을 덮는다
꽃은 언제 피려나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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