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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내음 Apr 07. 2016

네 번째 편지

너와 한 몸으로 떠난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 태교 여행 

사랑하는 나의 딸, 도담이에게 


오늘은 날이 잔뜩 흐리다. 주방 너머 창문을 슬쩍 넘겨다보니 색색의 우산들이 오가고 있더라. 봄비가 내리나 봐. 만개한 봄꽃들이 떨어질까 걱정되지만 촉촉해지는 땅에 봄도 빨리 올 것 같아 봄비가 반갑네. 오늘은 놀이터 외출은 못하겠지만 대신 보드라운 봄비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지낼 수 있겠다. 하루만 봄비에게 미끄럼틀을 양보해주렴.


사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비는 여름의 장대비인데, 봄비는 내리는 소리가 예뻐서 또한 좋아하는 비란다. 봄비가 오니 너와 처음으로 떠났던 여행이 떠올라. 그때도 이렇게 봄비가 왔었거든. 의욕적으로 떠났던 2박 3일의 제주도 여행을 봄비와 계속 함께 했던 기억이 나네. 도착하자마자 한 나절, 떠나는 날 한 나절을 제외하곤 종일 노란 우산을 쓰고 제주도를 돌아다녔어. 


네가 숨어있는 엄마 뱃속 공간이 점점 늘어나고 엄마의 배도 한껏 부풀어올랐지. 그러던 어느 날, 산부인과 선생님이 말씀하시더라. "이제 여행을 가셔도 됩니다." 애초부터 여행을 갈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는데 그 말을 들으니 꼭 떠나야 할 것 같았어. 주변에서도 부추겼지. 지금이 아니면 이제 몇 년간 여행은 없을 거라고. 정말 그럴 것 같아 떠났던 제주도 여행. 너와 한 몸으로 호흡하고, 걷고, 먹고, 감탄했던 그 여행을 사람들은 '태교 여행'이라고 부르더라. 


태교란 게 사실 아이와 한 몸일 때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는 차원으로 보자면 아이를 제 몸에 품은 엄마들이 떠나는 여행이 태교 여행이라 불려지는 것은 딱히 틀리지도 않은 것 같아. 사실 처음에는 그 말이 몹시 어색했지. 무슨 태교를 위해 여행까지 가나 했었거든. 그런데 실상은 태교를 위해 간다기보다 이제 아이가 생기면 가기 힘든 여행을 임신 중에 기어코 떠나는 부모들이 괜히 미안해서 태교 여행이라 이름 붙인 것은 아닌가 몰라. 이건 어디까지나 엄마 생각이지만.


태교 여행이라 이름 불리는 그 여행을 요새는 외국으로 떠나는 경우가 많단다. 엄마랑 아빠는 빡빡한 회사생활에 휴가를 오래 쓸 수 없어 남쪽의 보물섬, 제주도로 떠났지. 임산부 직장인으로 나름 피곤한 생활을 버티다가 도착한 제주도는 엄마에겐 천국이었어. 비가 와도 너무 좋았지. 세상에, 회색빛으로 물들 뻔했던 엄마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제주도가 눈 앞에 있다니 믿기지 않았달까. 다녀온 이후에는 다시 제주도에 가고 싶어 거의 상사병이 날 지경이었으니깐.


태교 여행의 첫 걸음이 시작되던 햇살 넘치는 공원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엄마와 아빠는 작은 공원을 걸었어. 그 공원에서 이어지는 산책길은 해변으로까지 이어져 많은 관광객이 즐비했지만 공원만큼은 사람들이 많지 않아 뱃속의 너와 걷기 딱이었지. 서울에 있는 나무들보다 좀 더 넓적하고 반짝반짝하게 빛나는 나무종들이 햇살과 만나는 그림만으로도 우리가 제주도에 와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단다. 저 공원에서 아빠와 여러 사진을 찍고 여기를 다시 너와 와서 걷고 싶다고 얘기했었단다. 


그런데 기분 좋은 햇살은 딱 한 나절이었어. 그 날 오후부터 먹구름이 몰려왔지. 서울에서 퇴근길에 비가 왔다면 핸드백에 우산까지 배 나온 임산부는 정신이 없어 짜증이 났을 지도 모르겠다만 제주도니깐 모든 게 용서되었어. 눈 앞에 바다가 있고 걸어가면 빌딩 숲이 아닌 초록 숲이 나오는 제주도니깐. 

흐린 날에도 시원한 풍광을 자랑하던 협재해수욕장


2박 3일간 짧은 기간에 그래도 부지런히 여러 곳을 구경 다녔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곳이 있었어. 첫 번째 장소는 몸이 무거운 엄마가 궂은 날씨에도 기어코 모래사장을 밟도록 만든 협재해수욕장이었지. 사진을 봐봐. 정말 대단한 풍경이지? 사실 도담이 너도 작년 가을에 저 곳의 모래사장을 네 발로 밟았단다. 아직은 너무 어려서 작년 가을의 기억이 선명한 지는 엄마가 모르겠다만 분명 너는 저 곳을 무려 두 번이나 다녀왔어. 엄마 뱃속에서 한 번, 엄마 손을 잡고 또 한 번. 마음이 탁 트여서 계속 서있으면 좀 더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될 것 같은 풍경이야. 햇볕이 쨍쨍 내려쬐는 여름에 또 한 번 가서 그때는 저 바다와도 만나보자. 


제주도 하면 떠오르는 바람 부는 언덕배기 송악산

두 번째 장소는 바람이 머리를 뒤엉키게 해도 마냥 웃음이 나던 송악산이야. 물론 작년 가을에도 너와 함께 송악산을 들렀지. 너를 안고 걸어가기가 벅차 먼발치에서 언덕을 구경만 하고 와서 몹시 아쉬웠어. 태교 여행 때는 언덕배기까지 올라갔단다. 비바람이 불던 험한 날인데도 바람과 풍치의 어우러짐이 시조 한 편을 읊게 만들 것 같아 인상적이었어. 험한 날씨 따위는 이미 잊고 넋 놓고 바다와 산을 번갈아 바라만 봤지. 다음 제주도 여행 때는 도담이 너도 씩씩하게 언덕을 향해 올라가자. 언덕 밑으로는 풀을 뜯는 말들도 노닌단다. 절경이지.


태교 여행을 하면서 엄마가 정말 태교에 충실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 다만 발을 딛는 한 곳 한 곳마다 탄성을 지르던 게 기억나네. 그때마다 배에 있던 너는 무슨 일인가 싶어 놀라진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혹은 엄마가 기분이 좋으니 너도 들떠 양수 속에서 자유형을 했던 것 아닌가 상상해보고도 싶네. 


아마 우리는 앞으로 운이 좋다면 해마다 제주도를 갈 지도 몰라. 엄마, 아빠가 좋아하는 여행지니깐 그렇게 하려고 생각 중이거든. 갈 때마다 다른 빛깔의 햇살과 다른 보드라움의 바람을 만나겠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나누면서 다른 추억을 때마다 얻어올 거야. 그 추억들이 켜켜이 쌓여서 언젠가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때 너의 보물상자 한편에 놓일 수 있게 된다면 엄마는 참 기쁠 것 같다. 정말 그런 날이 오게 된다면 그 시작은 탯줄로 느껴봤던 엄마와의 태교 여행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주길 바래. 


봄비가 하루 종일 땅을 촉촉하게 물들게 하겠다. 봄꽃의 향기까지 길에 물든다면 오가는 사람마다 봄을 느낄 수 있어 더욱 좋은 하루가 될 수 있을 테니 그러길 기도해야겠어. 보슬보슬 내리는 봄비를 너도 듣는다 생각하며 엄마가 지은 동시도 감상해주렴. 


봄꽃의 향기에 물들고 싶은 봄날

엄마로부터


봄꽃의 여행

톡톡 이마 위로 봄비가 떨어집니다
톡톡 마음이 열리라고 봄비가 떨어집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나에게
봄비가 손을 내밀어 주네요

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러 가자

바람에 들려오는 먼 이야기들이
이제 빗소리처럼 맑게 들려요

친구와 뛰어가는 장화 소리
엄마와 웃고 가는 운동화 소리

툭 떨어져 버려 외로울 줄 알았는데
더 많은 이야기에 심심하지 않네요

봄비가 나를 어디까지 데려다줄까요
봄비가 멈추면 이야기도 멈추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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