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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영작가 Apr 17. 2020

글로써 마음을 나눈다

당신은 어떤 책을 읽고 있나요?

 가슴을 따듯하게 해준 한 편의 영화가 있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다. 독특한 제목에 끌려 보게 된 영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일하게 독일에 점령되었던 영국의 영토, 건지 섬을 배경으로 섬 사람들의 이야기를 편지글 형식으로 그린 소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다. 소설은 2008년에 절판되었다가 독자들의 요청으로 2010년에 재출판되었고 영화는 2018년에 개봉했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줄리엣은 작가다. 엉뚱한 면이 있지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여자다. 어느 날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문학회의 회원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다. 그녀의 글이 담긴 책이 인연이 되어 도시라는 남자는 자신이 찾고 있는 저자의 책을 구하기 위해 그녀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들은 서로 얼굴은 모르지만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의 감정을 공유한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감자 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문학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작가로서 새로운 책을 구상하고 있던 줄리엣은 북클럽에 대한 글을 써보려는 목적으로 건지섬을 찾아간다. 런던을 떠나는 날 청혼을 받은 그녀다. 평범한 북클럽 회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아픔을 알게된 줄리엣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세상에 대해 고통을 느낀다. 


 건지섬은 전쟁이 남긴 상처가 가득한 곳이었다. 전쟁 포로와 노예들로 가득했던 곳. 하루종일 굶으며 일하다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 유일하게 주어진 식량이 감자였지만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줄리엣. 건지섬을 떠나는 날 약혼자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한 사람.


  "그 사람은 어떤 책을 좋아하나요?" 


 줄리엣은 대답하지 못한다. 이 대목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무엇을 아는 것일까? 그 사람의 재력, 학력, 하고 있는 일만으로 상대방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얼굴은 모르지만 글로써 마음을 주고 받았던 사람이 자신을 더 잘 아는 것이 아닐까? 줄리엣과 도시는 처음 만났지만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짧은 시간 함께하면서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이끌린다. 이미 아픔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각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문학회 회원들과 함께 하면서 그녀는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그들을 몰랐던 이전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기로 결심한다. 런던으로 돌아간 그녀는 마음이 이끄는대로 파혼을 하고 건지섬 문학회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자신이 원하는 삶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재력가와의 결혼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지 말아달라는 문학회 회원들의 바람대로 출판하지 않고 그들에게 선물로 보낸다. 결국 건지섬으로 돌아와 도시와 결혼하게 되는 줄리엣. 건지섬의 아름다움과 시대적 아픔이 함께 공존하는 영화다.  


 줄리엣과 도시가 주고 받는 편지를 보며 중학교 시절 내내 편지를 주고 받았던 군인 아저씨가 생각났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천주교 재단이어서 수녀님들이 많았다. 너무나 아름다웠던 생물 선생님은 수녀님이었다. 국군의 날, 생물 선생님은 우리에게 군인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라고 이름과 주소를 알려주셨다. 나는 정해진 이름의 군인 아저씨에게 편지를 썼고 군인 아저씨는 답장을 보내왔다. 호칭을 내내 군인 아저씨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분명 나이가 많지 않았을 텐데 그때 군인 아저씨는 내 인생에 멘토와 같았다. 손글씨가 멋졌고 생각은 더 멋졌다. 편지를 주고 받으며 나도 모르게 고민들을 편지에 썼던 기억이 난다. 그때 편지들을 잘 간직했어야 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의 감정은 고스란히 가슴속에 남아있다. 


 책을 쓰고 독자들과 공감하며 나 역시 친구보다 독자들이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종종 친한 사람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들을 책에 담기 때문이다.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는 말을 얼굴도 모르는 독자를 향해 말을 하고 말을 건다. 


 어린 시절, 누군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 그 사람이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던가. 쏟아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질문들로 가득 채우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을 알기 위해 던져야 하는 질문들을 그때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이를 먹을수록 인간적인 삶의 조건들이 예전에 내가 알고 있던 것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비싼 음식을 먹으며 배를 채우는 것보다 보잘것 없는 음식이라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먹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나를 잘 안다고 하지만 마주보고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인생에서 단 한 번 만나게 되는 사람이지만 그 순간 가슴벅차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우연히 날아온 한 통의 편지가 줄리엣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것처럼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도 매순간 변화를 일으킬 기회들이 가까이에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든 그 순간, 마음이 진심을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간다면 그 길이 고통일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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