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별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거 같았어요. 근데 그렇다고 내버려 두면 안되니까요."
오늘은 6주 만에 돌아온 진료일.
근황에 대해 나누면서 요즘 책 정리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책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다.
그게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인지 그저 책 '수집'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찌됐건 책을 좋아하는 건 매 한가지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 또한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다.
책을 읽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
책을 읽지 않아도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사람.
돈 생기면 적어도 한 권 이상의 책을 사는 사람.
언제까지고 책을 사고 책장에 '전시'(...)할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좀 달랐다.
우선 종이책을 사지 않게 됐다.
조금 많이 늦었지만 전자책의 '맛'(?)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우선 전자책은 가격이 종이책보다 저렴하다.
그리고 몇 권이든 전자책을 읽을 수 있는 도구만 있다면 그게 어디든 상관없이 읽을 수 있다.
게다가 내가 전자책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읽고 활용하는 환경의 '압도적인' 편리함 때문이었다.
종이책의 경우 중요하거나 의미 있는 문장에 줄을 긋는 게 일반적인데 보기 좋지 않은 게 사실이다.
줄을 그으면 다시 읽을 때 방해되기도 하고 나중에 별로 마음에 드는 문장이 아닐 때 지우지 못하거나 지우더라도 흔적이 남는다.
또한 따로 어디에 정리해놓지 않는 한 표시한 문장을 찾는 게 어렵다.
특히 어떤 특정 단어만 생각나고 어디에 있는지 모를 때 일일이 책 구석구석을 뒤져야 하는 불편함도 있다.
비슷한 책을 여러 권 읽다보면 이 내용을 이 책에서 읽었는지 저 책에서 읽었는지 확신할 수 없게 되고
이건 그대로 시간과 심력 낭비로 이어진다.
그런데 종이책은 이런 문제를 한방에 해결해준다.
우선 책에 표시하는 방법이 간단할 뿐만 아니라 완벽한 수정과 삭제가 가능하다.
그리고 내가 가장 필요로 했던 검색 기능이 있다.
여기에 더해 내가 표시한 부분을 모아서 따로 볼수도 있고 그 외에도 글씨 크기나 서체도 변경 가능하다.
그래서 한 5년 동안 종이책을 사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사놓은 책이 한가득이라 책장을 가득 채우다 못해 집안 구석구석을 채웠다.
조그마한 집구석에 300권이 넘는 책들이 어떻게 들어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거실과 다른 방에 있는 책도 정리 대상인데,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양극성 장애 발병 이전의 나는 짐정리의 달인이었다.
정리정돈을 좋아하는 엄마의 평에 따르면 가족 중 내가 제일 짐이 적고 필요한 것만 있다고.
그런데 지금은?
형이 분가한 뒤로 책상이 2개가 되었음에도 제대로 책을 펼 공간이 없다.
겨우 PC 책상만이 글을 쓰거나 책을 펼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이제 양극성 장애 환자가 된지 10년차.
약물치료도 안정적이고 딱히 큰 문제가 없어서일까.
주변 정리에 관심이 생겼다.
바닥 이곳 저곳에 쌓여 있는 잡다한 짐들, 책부터 이런저런 서류나 아이디어 노트, 그 외에 내가 샀는지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를 정체불명의 물건들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서랍장이나 책장을 사서 정리할까 했다.
하지만 방을 돌아보니 그 어디에도 새로운 가구를 넣을 장소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딱 하나, 기존의 짐을 버려야 했다.
특히 이미 있는 책장을 비우면 어느 정도 공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말은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뜻.
이전에도 공간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책을 정리해야 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기에 마음 먹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든 물건이든 간에 애착이 있는 대상과 이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이도 발병 전에 가지고 있던, 버릴 물건은 가차 없이 버리던 성향은 남아 있어서 필요 없는 책들을 버리는 건 나름 쉬웠다.
하지만 애매한 책들, 살 때 어느 정도 '어머 이건 읽어야 해'라는 생각으로 골랐던 책들은 잔류와 이별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정해야할지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읍참마속이라고.
눈물을 머금고 정리에 들어갔다.
선물 받거나 의미가 있는 책들, 가령 '데미안', '그리스인 조르바', '아직도 가야할 길' 등등은 소장용.
괜찮을 것 같아서 샀지만 읽지 않을 책들은 판매용.
읽지는 않았지만 관심있는 분야의 책이라서 pdf로 만들 책들은 전자책용.
(가내 수공업으로 파괴식 전자책 만들기를 할 예정이다)
어디에 판매할지 고민하다가 두 부류로 나눴다.
알라딘에 직접 팔기와 회원에게 팔기 이렇게.
주로 매입 불가거나 지나치게 낮은 가격으로 매입하는 책들을 회원에게 팔려고 내놨다.
목적이 돈보다는 빠른 정리기에 대부분 거래가보다 낮은 수준으로 책정했다.
중 등급의 책보다 싼 최상 등급이라고?
아 이건 못참지, 라는 사람들을 노린 전략이랄까.
과연 얼마나 팔릴까, 5월 내로 안 팔린 책들은 가차없이 다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거짓말 같이 3시간 만에 연락이 왔다.
올린 날부터 지금까지 매일 한 명씩 구매자가 생겼다.
오늘도 아까 병원 갔다오는 길에 주문이 접수되었고 조금 있다가 배송할 예정이다.
안녕. 그동안 사랑했고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길 바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