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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혜민 Oct 20. 2020

이야기가 반복되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퍼블리 큐레이터의 말] Google Walkout 관련 기사를 보고

2018년 12월, 퍼블리 큐레이터로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선정하고 '큐레이터의 말'을 썼다. 퍼블리에서는 큐레이션 서비스 종료로 볼 수 없어 브런치에 옮긴다. 


선정 기사 https://nyti.ms/2yJulez


세상이 저만치 앞서나가는 것 같다가도 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있다는 무력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전과 달라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변화의 속도와 크기가 얄궂어서 희망을 품으면 절망이 금세 따라오곤 하죠.


올해는 직장 내 성폭력, 신체적/언어적 폭력에 대한 소식이 끊이지 않던 해였습니다. 유난히 새로웠던 것도 아니고 내년엔 확실히 달라질 거라 전망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달라질 것 없다’고 피곤한 귀를 닫을 때가 더 많아질 수도 있고요.


그러나 누군가 되풀이하고 싶지 않을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면 아무리 익숙한 반복으로 느껴지더라도 그 안의 구체성을 주목해야 합니다. 기시감 속에서도 새로운 마음을 품는 것이 변화의 물결을 일게 하고 그 순간에 반복되던 서사가 한 발 나아갈 수 있거든요. 


물론 더디고 지루한 일일 겁니다. 커다란 풍경으로 보았을 때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구체적인 사건을 주목할 때, 나의 영향력을 이해하고 다루기 시작할 때, 이미 변화의 물결 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내년을 준비하는 첫 기사로 Google walkout을 소개하는 이유도 이 믿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폭력 문제로 사임한 앤디 루빈에게 9천만 달러(약 1,006억 원)의 퇴직 보상금을 지급한 사실이 뉴욕 타임즈에서 최초 보도된 이후, 11월 1일 11시 10분에 전 세계의 약 50개 도시에서 약 2만명의 구글 직원들이 사무실 밖으로 걸어나왔습니다. 전세계 구글 직원 중 20%가 파업한 셈입니다. 


파업과 함께 다섯 가지의 대안을 제시했는데요. 그 중 하나는 회사가 성폭력 사건에 대해 자체적인 중재를 진행하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소송할 수 없도록 하는 정책을 폐지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일주일 뒤인 11월 8일에 구글은 해당 조항을 삭제했습니다. 


구글이 해당 조항을 삭제한 그 다음 날, 연초까지만 해도 해당 정책이 적절하다고 옹호했던 페이스북이 회사 내 중재를 선택 사항으로 조정했습니다. 이런 변화를 읽은 버즈피드는 테크 기업에 ‘성폭력 문제를 기업이 중재하고 소송할 수 없도록 하는 정책을 없애겠냐’고 물었고 Airbnb, eBay, and Square가 그러겠다고 답했고요. 아직 해결될 부분이 많더라도 기울어져 있던 절차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계기임은 틀림없었습니다. 사무실 밖으로 내딘 한 걸음이 테크 업계에 큰 환기가 되었죠. 


Google walkout에 참여한 이들도 변화의 흐름이 얼만큼 확장될지 아마 예상할 수는 없었겠지만 변화가 시작되었음은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Last week was one of the hardest weeks of my yearlong tenure at Google, but today is the best day, I feel like I have thousands of colleagues all over the world who, like me, are committed to creating a culture where everyone is treated with dignity.” - Brenda Salinas, a Google employee in London
“I am fed up, We will bring the consequences.” - Demma Rodriguez, a leader of the Black Googler Network
“We’re optimistic that we’ve opened a conversation about structural change here and elsewhere” - Claire Stapletonm, a product marketing manager for YouTube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12월 5일에 Google walkout for real change는 <Invisible no longer: Google’s shadow workforce speaks up>를 발표했습니다. 구글의 절반 이상인 비정규직에 대한 동등한 대우를 원한다는 내용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할 것 없이 모두 회사 공동체를 변화시키기 위해 사무실 밖으로 나갔지만 일주일 뒤에 열린 전체 토론에서 비정규직은 제외되었기 때문입니다.


구글이 중재 정책을 삭제한 다음 날에도 ‘직장 내 성폭력 문제를 끝내기 위해서는 구조적인 권력 불평등을 고쳐야 한다'는 의견을 밝힌 것과 연결됩니다. 그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결과는 ‘모든 구글 직원의 동등한 권리를 위한 투명성과 책임 그리고 구조적인 변화’입니다. 이 안에는 인종, 성별, 계약 형태 등 모든 차별을 담고 있습니다. 


이 변화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냐고 물으면 답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앤디 루빈에 대한 뉴욕타임즈의 보도가 기폭제가 되었겠죠. 이전의 사건들로 변화에 대한 바램이 누적되어서 그냥 넘어가지 않고 터져나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회사 밖으로 나가자고 제안해서였을 수도 있고, 누군가 오거나이저 역할을 자처해서 일수도 있겠죠. 또 누군가 구글 스프레드시트를 만들어 전세계 구성원의 의견을 받기 시작해서 일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게 시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영향력을 이해한 개인들이 구체적인 시도를 해서 만들어낸 사건들이 연결되어 구성한 흐름인거죠. 이 흐름 안에 들어서는 순간엔 지루하게 견뎌낼 때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것들이 보입니다. 지금 내가(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변화하게 될 지 좀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죠. 밖에서는 잔잔하게만 보이던 물결일지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 온 몸으로 읽어내면 다를 겁니다. Google walkout for real change는 물결 안에 있고 물결을 바꾸고 있습니다. 


물론 무력감에 뒤덮이는 건 순식간입니다. 침체된 마음을 다시 길어올릴 에너지 조차 생기지 않는 순간도 있고요.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올해 초에 저도 그랬습니다. 한껏 웅크리고 있다가 여름이 되어서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시도를 시작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저의 물결 안에서는 올해가 작년보다 나았고 내년에도 더 나아질거라 생각합니다. 혹여 크게 봐서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하더라도요. 


반복적으로 들리는 절망적인 소식에 모든 게 지겨워지는 순간에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바라보고 나아가 어떤 시도로 사건을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언제든 두 다리를 딛고 서 있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어디에 서 있을 것인지는, 언제나 그렇듯이 선택의 문제입니다.


Google walkout이 있었던 같은 11월에, 삼성전자에서 일하던 딸이 직업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지루하고 치열한 싸움을 이어가던 황상기 씨는 11년만에 삼성전자로부터 사과를 받았습니다. 이야기가 반복되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순간 큰 전환이 생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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