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이제 옳은 길과 쉬운 길 중에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세 가지 사건이 맞물리면서 올해 초부터 “나의 기준”에 대한 생각을 붙잡고 있다.
‘그 정도는 그냥 넘어가도 괜찮다’는 어른이 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가장 강렬한 첫번 째 사건은 작년 박근혜게이트 사건. 그 당시 날 가장 화나게 만든 것은 이미 알고도 모른 척한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이었다. (김무성이 “새누리에 최순실 모르는 사람 어딨냐”고 말했다.) 그 화로 인해 ‘일상의 민주주의’를 많이 생각하게 되기도 했고, ‘그 정도는 그냥 넘어가도 괜찮다’는 마음이 어디서 오는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마침 대학을 졸업하면서 이런 고민을 몰입해서 할 공간이 없었다. 운좋게도 좋은 선생님들에게 배우면서 그 분들이 가진 질문과 고민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더 나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겠단 믿음이 있었는데 이제 스스로 해나가야 했다.
또 하필 졸업을 하자마자 집을 구하고 전세 대출을 받으면서 엄청 애먹고는 세상의 매운 맛을 혹독히 알아버렸다. (노량진 길바닥에서 눈물을 흘렸다네) 그 때 “이런 게 어른의 삶이란 건가” 겁이 났고 준비되지 않은 채 떠밀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좋은 어른”은 되고 싶은데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흐르는 대로 살다간 ‘그 정도는 그냥 넘어가도 괜찮다’는 어른이 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직업이나 결혼 등의 선택 앞에 놓였을 때 이전 어른들의 기준은 마음에 안들지만 대안은 없는 막막함, 그 막막함 때문에 이젠 선택지 안에서 고를 일이 아니라 새로운 기준을 선언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의 모습 혹은 기준은 무엇인가?”
가장 손 쉬운 방법으로 선택한 게 선생님들을 대신 할 “좋은 어른”을 찾는 거였는데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아서 마음이 가난해지고 화가 많아졌더랬다. “좋은 어른”이 없다는 말을 달고 살던 어느 날, 내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찾는 좋은 어른은 어디 있나?”라는 질문의 전제는 나와 비슷한 시작점을 갖고 유사한 일을 바탕으로 내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삶을 살면서도 훌륭한 인품을 갖추길 기대한 거였는데, 그 자체가 매우 욕심이었다. (인정)
질문을 “내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의 모습 혹은 기준은 무엇인가?”로 바꾸니 대답은 무궁무진했다. “좋은 어른”이라는게 결국 내 주관인거고, 어른의 모습이라는 것도 하나의 정답이 있는게 아니라 각자의 기준을 갖고 삶을 가꾸면서 여러가지 유형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니 화도 없어졌다. 인간은 아주 복잡한 존재이니 어느 면은 훌륭해도 또 어느 면은 의아한 면을 가질 수 있지 않나.
그래서 “좋은 어른”을 찾는 대신 “내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의 기준”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수집처는 영화나 드라마, 인터뷰 혹은 동료와의 대화가 되기도 했고, 일상의 장면이 되기도 했다. 올해 5월 22일부터 3개월 동안 스물 여섯 가지 기준을 수집했다. 내가 그 모습을 다 갖출 순 없어도, 내가 생각하는 기준을 다듬는것만으로도 많은 위안이 되었다.
지금까지 수집한 스물 여섯 가지의 기준 안에는 내가 원래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야 깨달은 기준도 있고, 이런 기준을 벼르며 살고 싶다고 생각하며 습득한 기준도 있다. 이 기준들은 가장 자주 쓰는 노트에 적어두고 가끔 찾아 보는데 요즘 제일 자주 보는 기준은 두 가지다.
“과정을 평화롭게 가꾸는 사람”
하나는 내가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에 깨달은 기준으로, “과정을 평화롭게 가꾸는 사람”이다. 이 과정 안에는 협업의 모습도 있고, 함께 하는 사람들의 마음 상태나 욕망도 들어있고, 권력 구조의 형태도 있고, 일 자체가 잘되는 것도 있고, 여러모로 복합적이다. 이 복잡하게 맞물린 요소들이 잘 풀려나갈 때, 괴로운 이 없이 일이 잘되어가는 경험을 할 때, 난 편안하다. 안심이 된다고 해야 하나. 많은 경우가 평화롭기 쉽지 않은데 만약에 내가 애를 써서 바뀔 여지가 있다면 망설임 없이 애쓸 수 있다.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과정이 훌륭하면 대체로 성과도 좋다.) 잘 가꾼 과정의 경험은 한 번의 결과가 아니라, 언젠지 몰라도 몇 번의 결과를 계속 만들어내는 힘이 있고 그 힘에 더 집중하는 거다. 일의 지속성과 연속성을 만드는 자원은 과정의 경험, 그 평화로움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기 의제를 꾸준히 쫓고 그 경험을 모두의 자원으로 남기는 사람”
남은 하나는 벼르며 살고 싶은 기준인데 “자기 의제를 꾸준히 쫓고 그 경험을 모두의 자원으로 남기는 사람”이다. 자기 의제를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반짝거림과 단단함을 보고 있자면, 보기 좋은 걸 넘어서 탐이 난다. 의제에 매몰되어 하나의 정답을 정해버리거나 시행착오를 개인의 감각으로만 두는 사람들도 있다. 각자의 이유와 사정이 있겠지만 경험을 모두의 자원을 잘 축적하고 새로운 해답을 꾸준히 찾는 사람이 더 빛나 보인다.
이 기준을 처음 수집했을 때는 자기 의제를 쫓는 다는 것은 특정한 이슈나 주제를 잡고 조직을 만들어 선언해가며 할 수 있는 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과 이 기준에 대해 이야기해보면서, 자기 의제가 주제가 아니라 관계의 방식이 되기도 하고 리더가 아니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의 풍경을 바꾸어가면서도 가능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좋은 기준”을 수집해두면 이렇게 기준이 기준을 낳고 날카롭게 세워준다. 그 재미도 쏠쏠하다.
스물 여섯 가지의 기준도 이미 많은데 계속 수집하다가는 너무 엄격한 사람이 되는게 아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도 모든 기준을 넘어서는 사람으로 살아갈 자신은 없다. “좋은 기준”을 모아서 그걸 잣대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하며 살겠다는 게 아니라, 수집한 기준을 자원 삼아 내가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이다.
한편으론 좀 엄격하게 살면 안되나, 싶기도 하다. 요즘 <비밀의 숲>을 쓴 이수연 작가에게 영감을 줬다는 덤블도어 교수의 말을 자주 되새기는데, 그럴수록 옳은 길과 쉬운 길 중에 쉬운 길을 선택할 나의 나약함이 보인다. 필사적으로 “좋은 기준”을 세울 수 밖에 없다. “좋은 어른” 까지는 어려워도 나라는 사람이 만드는 어른의 유형이 적어도 후지진 않았으면 하니까.
기준을 수집하기 시작할 땐 3개월 만에 스물 여섯 가지나 생길 줄은 몰랐다. 척박하던 마음이 잔잔히 채워지고 있다. 실은 올해 초에 “잘 하는 것보다 하는 데에 집중해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수집을 하다보니 무엇을 “할” 때 이렇게나 많은 접근과 태도가 있구나 싶어 일종의 수확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편견 없이 너르게 관찰하면서 “좋은 어른의 기준”을 수집하는 기쁨을 꾸준히 누리고 싶다. 힘이 닿으면 그 기준에 닿는 사람이 되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