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 브랜드의 마케팅 포지션 오퍼를 받았다. 한 번의 이직 실패 후 더욱더 까다롭게 이직 조건을 따져보던 나에게 이 곳은 꽤 매력적인 곳이었다. 이직하고 싶었던 뷰티 산업군, 그리고 광고업에서 시야를 넓힐 수 있는 마케팅 포지션, 큰 조직의 톱니바퀴로 일하는 것이 아닌 10명 내외의 작은 조직에서 나의 목소리를 내며 일할 수 있는 스타트업. 고민 없이 오퍼 레터를 수락했다. 3월 6일 퇴사. 3월 23일 입사. 2주 정도의 짧은 방학을 보내고 나는 다시 직장인이 되었다.
내 자리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업무까지. 나에게 3단 콤보 압박감이 다가왔다. 불과 얼마 전 첫 이직때도 그랬지만 이직은 정말 신입사원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게 한다. 아니 신입사원 때 느꼈던 중압감보다 1.5배 정도 큰 것 같다. 왜냐면 난 퍼포먼스를 내야 하는, 매달 받는 월급값 이상을 해내야만 하는 경력직이니까.
입사 후 소속 팀의 업무 분장에 대해 설명을 듣고 몇 가지 업무는 바로 인수인계받았다. 앞으로 나와 소속 팀이 하게 될 업무는 넓게는 상위 브랜드의 브랜딩 & 프로덕트 단위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더 들어가서는 다양한 마케팅 접점에서의 콘텐츠를 기획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해왔던 일이었기에 잘할 수 있겠다 자신감이 붙었다. 하지만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생각만큼 일이 진척되지 않았다. 왜 속도가 나지 않지? 1~2시간이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루 종일을 붙잡아도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가만히 마우스에서 손을 내려놓고 원인에 대해 생각해본 결과 일을 해내고 성과를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1) 새로운 산업에 대한 이해
무엇보다 뷰티 산업군의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가장 필요했다. 내가 일해왔던 광고 회사의 시스템과는 완전히 다른 구조이기 때문이다. 기획> 제작> 매체 집행의 체계적인 프로세스에 6년 동안 길들여져 온 나에게 뷰티 산업은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이었다. 상품을 '제조' 하고, '유통' 하는 것이 이 시스템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제조를 담당하는 상품기획팀과 유통을 담당하는 채널팀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제조와 유통의 프로세스와 역할을 간과하고 마케팅에만 포커스를 하다 보면 큰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신제품의 마케팅 플랜을 개발할 때, 어떤 유통 채널에 입점하고 채널에서 어떤 프로모션을 진행하는지 고려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 거대하고도 새로운 시스템을 익히는 것이 내가 당장 일에서 성과를 내는 것 보다도 중요한 과제였다.
(2) 브랜드와 제품에 대한 이해
광고는 마케팅 활동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브랜드사에 합류한 후 절실히 느꼈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일은 브랜드 <-> 잠재 소비자의 접점에서 광고적 메시지를 기획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브랜드와 연결된 모든 접점을 고려한 메시지를 기획해야 한다. 예를 들어, 브랜드 <-> 유통 채널, 브랜드 <-> 오프라인 구매자, 브랜드 <-> 온라인 구매자, 브랜드 <-> 플랫폼 등등..... 모든 접점에서 발신되는 메시지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정말 정말 x22 중요하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브랜드의 철학과 방향성 및 제품에 대한 심도 깊은 스터디가 필요하다. 예로, 맡아서 하고 있는 일 중 임상 실험과 엠블럼 같은 제품 신뢰도를 높이는 asset을 기획하고 관리하는 일이 있는데 임상 논문 데이터 수백 장에서 유의미한 인사이트를 뽑아내기 위해서는 제품 성분 하나하나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해야 했다. 가장 어려운 업무 중 하나이고 BM 팀장님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스터디하고 있다.
당장의 성과보다 내가 소속된 회사, 그리고 맡은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부터 조급함을 내려놓고 일부러라도 천천히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빠르게 일을 해결해내는 것이 곧 일을 잘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6년 차 대리의 모습을 내려놓고, 하는 일의 목적과 방향을 생각하며 일하던 신입사원의 마인드로 일을 해나가니 조금씩, 하나씩 일이 진척되는 것이 느껴졌다. 적게는 억에서 몇십억 단위의 마케팅 캠페인을 진행하던 광고회사 시절에 비해 예산은 적고, 업무의 커버리지는 넓어져 정신없는 하루하루였다. 하지만 내가 기획한 콘텐츠가 고객들에게 발신되고, 내가 고민한 기획 방향으로 자사몰이 조금씩 바뀌어가고, 새롭게 제안한 광고 플랜이 실현되는 작은 성과들을 경험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1달이 지나 월급날이 되었다. 월급계좌로 입금된 월급을 바라보며 1달을 나름대로 허투루 보낸 것 같진 않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맡은 업무들에 완벽히 적응하려면 최소 반년 이상은 걸리겠지만 6개월 후, 1년 후엔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