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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Dec 20. 2016

플라스틱 이미지의 분열

박근혜 감상문

신디셔먼(Cindy Sherman) <무제 영화 스틸#2 Untitled Film Still #2>

 현재 대한민국의 이 시점에서 궁금하기 시작한 것은(적어도 개인적으로는) 박근혜의 실제 성격(어느 정도는 나온 것 같지만 누가 전해주는 말이 아닌 그녀의 성격이 드러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다)이다. 박근혜가 그간 보여주려 했던 이미지는 아마 우아하고 고상하면서 자상한 중년 여성의 판타지적 가상 이미지와 더불어 정치적으로는 사회 통합적이고 우호적이면서 때로는 리더쉽도 발휘할 주 아는 참으로 대통령으로서의 이상적인 모습인 것 같다. 하지만 이제 그 가상의 이미지가 가차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으며 한 인간으로서 그녀의 실제 모습(제도권내에서  받들어지며, 카메라의 노출과 함께 대중들의 시선을 받으며, 특히나 최고 통수권자의 딸로서 자라온)이 드러나고 있다.(이러한 점에서 이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친박과 박사모에 대한 분석도 흥미로워 보인다.) 다시말해  카메라 속의 박근혜가 아닌 박근혜 그 자체가 까발려지고 있다. 사실 그녀의 후보 시절 내세웠던 공약들을 철저히 자기 스스로가 무시하고 있는 점을 비추어 그녀의 이중적 행동령을 깨달아야 했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봄에 따라 어긋난 파악을 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결국 결과론적인지 필연적인지간에 박근혜가 메스컴을 통해 보여주려 했었던 한국의, 정치의 이상향으로서의 주체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대신 '자신이 그러리라고 상상했던 그런 존재가 아니다'라고 하는 심리적 나르시시즘의 주체로 전락하였다. 신디셔먼(Cindy Sherman)의 <무제 영화 스틸#2 Untitled Film Still #2>에서 셔먼은 화장한 젊은 여성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 사이의 거리를 통해, 우리들 각자에 내재해 있는, 상상된 신체 이미지와 현실적 신체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포착해내고 있는데,1) 이는 정치인들이 매일 밤낮으로 작동시키고 있는 인지(오인)의 간극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역사적으로나마 인지를 오인으로 깨닫는 이 간극을 발견할 수 있다(가령 지금 이 박근혜게이트 사태로부터 박근혜에 대한 오인을 깨닫는 것처럼). 당시에는 분간이 되지 않는다. 이에 관해서는 "시뮬라크럼은 관찰자가 지배할 수 없는 거대한 크기와 깊이, 거리들을 내포한다. ... 간단히 말해 시뮬라크럼 안에 싸잡혀서 미쳐 가는 과정, 끝이 없는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2)라는 들뢰즈가 정의한 시뮬라크럼을 인용하고 싶다. 분간을 할 수는 없지만  대신 박근혜 스스로가 그리고 우리 대중들이 그녀(혹은 여타 정치인들)를 상상된 플라스틱 이미지로 읽어나가게 하는, 즉 그 분열적인 주체를 만드는 매체의 힘이 무엇인지는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박근혜는 정치적 뿐만이 아니라 메스컴에 기록되는 신체 이미지(미용 시술 자국)를 통해서도 스스로간의 간극을 드러내 보였었는데 현재 시국이 발발하기 전까지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중은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특히 그간 우리가 많이 봐왔던 그녀의 회의 모습이나 연설 장면에서 알 수 있는데, 어제 JTBC에서 보여준 박근혜 이미지에서 나타나는 바늘자국(전문가들의 의견에 의한 추정)은 그동안 우리가 보고 있으나 보지못한, 플라스틱 이미지에 가려져서 보지 않은 실재의 이미지이자 간극을 가리키는 하나의 표식이 된다. 

잭 골드스타인(Jack Goldstein) <당김 The Pull>
<당김 The Pull> 세부장면

 이와 관련해 먼저 예시를 들겠다. 위 세 장의 사진은 각각 색으로 가득 찬 큰 공간에 떠 있는 작은 형상을 보여준다. 깊은 바다 속의 다이버는 초록색 바탕을, 자유 낙하하는 사람은 파란색 그리고 우주 비행사는 은색 바탕색 속에 있다. 이 이미지들의 비교는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이미지에서 작용한다. 즉 이 인물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꽤나 충동적이고 제멋대로 굴러간다. 우리가 자유낙하한 느낌 혹은 우주에서 떠다니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기에 이러한 경험은 오직 매체(TV, SNS, 인터넷, 신문, 라디오)를 통해서만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은 위 사진처럼 상호적인 관계로부터 완전히 다른 맥락으로 이동한다. 즉 매체의 투명한 전달성은 매체로부터 분리된다. 따라서 이 <당김>의 가운데 이미지 출처가 자살의 사진이라는 점은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저 자유낙하에 관한 여러 배리에이션 중 하나의 예로써 존재한다. 이 이미지 속에 들어 있는 자살과 자유낙하의 간극을 사후적으로만 읽을 수 있을 뿐이다. 박근혜 얼굴에 있는 바늘 자국은 시술에 관한 폭로나 주장이 없었을 당시 전혀 그것으로 읽히지 않음은 매체를 통해 보고 있는 현실로 말미암아 어찌보면 당연하다. 메스컴이 보여주는 사실 아닌 사실은 플라스틱 이미지이자 판타지 이미지이며 현실과 괴를 달리하고 심히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 이러한 매체의 힘은 우리를 맹인으로 만듦과 동시에 아직도 자신의 세계안에 갖혀 있는 박근혜를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 실재의 자신과 상징의 자신간의 간극을 유발한 정신병의 발병의 원인 역할을 했었을 것이다.(나는 이를 역사적으로도 말하고 싶은데 오늘 결국 이러한 분열의 박근혜는 박정희가 낳은 경제성장의 환영의 산물임에 동시에 유신체재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분열적인 외상적 리얼리즘(Traumatic Realism)을 가리키고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자문하게 하는 박근혜를 왜 못알아봤을까 하는 자책은 옳지 못한 방향 설정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비극적인 사건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은 매체의 불투명성, 그리고 매체의 탈매체화(De-Mediumize)이다. 보이는 그대로 기록하고 전달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는 것, 오히려 분열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인지하자. 그렇다고 내 요지가 환상 속에서 나타나는 자아와 이미지의 혼동을 말해주는 오늘날의 시뮬라크라에 냉소적으로 살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의 이러한 사태가 발발했을 때, 숨어 있는 실재가 폭로됐을 때, 페허의 현장 속에서 자각을 하고 시뮬라크라를 똑바로 쳐다보게 해주는 각성제가 될 수 있는 순간은 등장한 다는 것이다. 부디 냉소적이거나 자기파괴적, 살인충동적 전쟁의 방향이 아닌 비판적, 건설적 모델을 찾아간다는 방향으로 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제프 월(Jeff Wall) <a sudden gust of wind after hokus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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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할 포스터(Hal Foster), 실제의 귀환,  p.237

2) 질 들뢰즈(Gilles Deleuze), Plato and the Simulacrum, October 27(Winter 1983)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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