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스토리텔링, 프레이밍, 그리고 퀸메이커
1. 출판사 시절에 편집장님과 카피 다듬는 일이 정말 재밌었다. 출판에서는 표지와 책 날개, 책 뒷면에 들어가는 카피, 책 표지 겉에 씌우는 띠지 카피가 중요했고 그다음으로는 보도자료, md가 보는 마케팅 자료에 들어가는 카피가 중요했다. 표지, 날개, 뒷면을 지칭하는 용어와 md가 보는 마케팅 자료를 지칭하는 말도 있었는데 지금은 다 까먹었다. 하여튼 표지 카피에서는 제목, 부제목이 중요했고 책날개에는 저자 소개가 중요했다. 뒷 표지는 표지 1면에서 풀지 못했지만 1면 카피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구체적 내용들이 중요했다.
나는 제목보다 부제목이 더 재밌었다. 부제목은 더 구체적이고, 퍼즐 같아서다. 제목은 좀더 감각적이고 직관에 호소하는데 부제목은 좀 더 이성적이랄까. 부제목은 제목과 만나서 책이 담고 있는 어떤 세계관을 프레이밍한다. 이 틀로 이 책을 바라보면 돼! 같은 가이드가 된다.
지금 교보문고 온라인 경제경영 분야 1위인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의 부제목은 “마늘에서 초콜릿까지 18가지 재료로 요리한 경제 이야기”이다. 이런 카피를 내가 그 당시 편집장님과 함께 작성한다고 가정해보면 이런 판단들이 있을 것 같다.
장하준은 이미 경제학 분야에서 잘 알려진 저자이다. 제목에서 저자를 내세우는 건 좋은 전략이다.
이 책의 원제는 edible economics로, 직역하자면 먹을 수 있는 경제학이다. 식재료와 음식을 통해 장하준식 경제 이슈를 살펴보는 책이고, 이런 뉘앙스가 제목에서 드러나면 좋겠다.
~레시피 같은 표현은 제목으로 이미 익숙해 독자를 설득할 필요가 없고 경제학이라는 단어와 붙었을 때 이질적이어서 재미있다.
그런데 좀 추상적이기 때문에 책 구매 결정에 더 도움이 될 만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부제에서 풀어 설명해주면 좋겠다. 내용에서 보니 식재료, 음식이 주요 소재이고 이 소재를 통해 경제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것이 드러나면 좋겠다.
~에서 ~까지는 다루는 것이 광범위하고 많을 때, 이것부터 이것까지 다뤘다는 느낌을 주는 표현이다. 혹은 시간적, 거리적 간극을 보여줄 때, 그러니까 엄청 크고 엄청 많다는 걸 보여줄 때 많이 쓴다.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익숙한 표현에 비춰보면, ‘한반도’보다 구체적이고 어떤 거리감을 체감할 수 있게 하는 표현이다.
그래서 여기서도 재료가 다양하니 ~에서 ~까지를 사용해 구체적으로 어떤 매력적인 게 들어 있는지 보여주면 좋겠다.
경제 주제로는 좀 광범위하고 특정 섹터를 타기팅하지 않기 때문에 ‘경제 이야기’ 정도로 두루뭉술해도 좋겠다.
18가지 재료로 보여주는 경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레시피라는 컨셉을 달았으므로 요리했다고 표현해도 재밌겠다.
경제 이야기를 요리했다고 하면 경제학 이야기가 좀 더 쉽고 발랄까지는 아니지만 하여튼 좀 위트도 있고 그렇게 느껴진다.
이런 식의 판단들이 작용하고, 큰 틀에서 이런 느낌의 카피를 작성하는 것으로 결정되면, 이 맥락에서 마늘을 넣을지 레시피라는 표현을 넣을지 경제 이야기라고 할지 '재료로 요리한'이라고 할지 이런 표현들을 구체적으로 교체해보고 더 나은 안을 찾아간다. 더 매끄럽고, 육성으로 읽었을 때도 막힘이 없는 것으로다가.
띠지는 유명인인 경우나 인물이 좋은 경우(???…) 인물 사진을 삽입하기도 하고, 해외나 공식적인 어떤 기관, 어워드 등에서 인정받았을 경우 누구누구 추천, 이런 것들이 들어간다. 주로 판매에 도움되는 워딩들을 넣는다. 유명인이면 얼만큼 유명한 사람이 어떤 노력으로 쓴 건지, 이런 것일 수도 있고, 임팩트 있는 문장일 수도 있고 인물 혹은 콘텐츠에 관한 임팩트 있는 리뷰일 수도 있다.
날개에는 앞쪽에는 저자소개 뒷쪽에는 저자의 다른 책이나 출판사의 다른 책 같은 게 들어간다. 저자소개는 책 내용, 컨셉과 관련 있도록 저자의 이력을 스토리텔링하는 게 중요하다. 왜 이사람이 이런 책을 썼는지에 관한 스토리는 저자의 신뢰성을 더한다. 뜬금 없는 이력의 소유자가 쓴 거라면 왜 그랬는지를 밝혀준다. 이것도 편집의 영역인 게, 저자의 모든 이력을 어필할 필요 없이 책에 도움이 되는 부분을 중심으로 프레이밍하는 것이다.
2. 출판 경험 이후로 카피 관련 책을 읽으면서 공부를 했었는데 정철의 <카피책>이 배울 점도 많고 인상깊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인상깊었던 것은 한 아파트의 일조권을 둘러싼 갈등 상황에서 제시된 카피에 대한 것이었다. 보통 아파트 주민들의 어떤 반대 시위 같은 걸 생각하면 “물러나라” “웬말이냐” 뭐 이런 카피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정철 씨는 이런 카피를 제안한다.
“아이들이 햇볕을 받고 자랄 수 있게 한 뼘만 비켜 지어주세요”
상황에 속해 있는 이들의 관점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것이다. 이 말을 본 이상.. 그대로 아파트를 짓는 행위는 아이들이 햇볕을 받지 못 하게 하는 파렴치한 일이 되어버린다. 아파트 일조권을 보장하라는 이권 주장이 단순히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게 아니라 굉장히 정당한 일로 포지셔닝되어버린다. 햇볕을 받고 뛰어노는 아이들이 직관적으로 떠오르며 감성이 자극된다.
이걸 본 이후로 나는 카피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다. 카피는 단순히 잘 쓴 문장, 후킹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은 아니다. 사람의 관점을 바꾸는 강력한 무기다. 스토리텔링의 아주 원천적인 힘이고 저널리즘에서 배우는 ‘프레이밍’의 영역이기도 하다. 내가 도달하고 싶어하는 타깃의 뷰를 완전히 바꿔버릴 수 있는 것이다. 프레이밍, 스토리텔링, 카피, 다 분절된 영역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3. 최근 <퀸메이커>라는 드라마를 봤다. 원래 정치, 권모술수가 주요한 드라마에서는 스토리로 스토리를 덮는 것을 보는 것과 스토리로 상황을 선점/타개/정의하는 우아한 수사를 보는 것이 묘미이다. 대표적으로 하우스오브카드. 삼국지도 마찬가지다. 퀸메이커는 드라마가 조금 뭐랄까.. 페미니즘 초기 아젠다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일단 그런 건 차치하고 스토리를 스토리로 덮는 일을 만들고, 상황을 스토리로 선점하는 우아한 수사를 여성들이 하고 있는 게 좀 생경하면서도 반갑고 재밌었다.
극중 손영심 회장이 자신의 회사 계열사 직원 출신 서울 시장 사재곤과 독대하는 장면이 있다. 사재곤은 전에 없이 당당하고 권위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돔 머리를 회장에게 들이밀었고, 그 이후 자신은 예전의 말 잘듣던 똥개가 아니라며 협박을 늘어놓는데, 그에 대해 손 회장이 아까 받은 돔 머리를 다시 사재곤에게 밀며 이런 말을 한다.
“이것도 시장님이 드시게. 대가리가 너무 커진 놈은 내 비위에 안맞아서”
삼국지에서도 여포가 동탁 잡겠다고 나설 때 어떤 장수가 “닭 잡는데 왜 소 잡는 칼을 쓰느냐”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어린 시절에는 왜 말을 이런 식으로 하는지 이해가 잘 안됐다. 내용 전개에 큰 도움도 안되는데 왜 이런 대사들이 있는 건지 지겹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도 나이를 먹어버려서 그런가 이런 게 이제는 심지어 재밌게 느껴지기도 하고 왜 하는지도 조금 알 것도 같다.
스토리는 사람의 관점을 바꾸는 힘이 있다. 관점이 다른 사람에게 팩트를 들이밀며 틀렸다고 논증하는 것보다 스토리를 통해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게 더 효과 있는 때가 많다. 스토리는 결국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고 마음이 움직여야 관점이 바뀐다. 오죽하면 예전에 어떤 미국 매체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을 만나면 팩트로 설득하려 하지 말고 얘기를 들어주라고까지 했다. (뉴욕타임스였던가..) 사람이 스토리에 얼마나 매료되는 존재인지는 <스토리텔링 애니멀>이라는 책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다.
위의 수사들은 일종의 스토리텔링과 관계가 있다. 어떤 상황이나 인물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것에 대입해 이야기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또 그것을 접한 이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상상해내고 그것이 마음에 자리한다.
손영심은 네가 아무리 날뛰어봤자 내 밑이고 네 이야기를 쥐똥만큼도 들을 생각이 없다, 라는 메시지를 지금 내 접시에 놓인 돔 머리가 너무 크고 머리가 너무 큰 놈은 비위에 안맞는다는 말을 통해 전달한다. 듣는 사람은 이 돔과 시장, 손회장의 관계의 어떤 역학과 이 상황에 담긴 다양한 감정을 스스로 스토리텔링할 수 있게 된다. 또 닭과 소는 체급 차이가 크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고, 그렇게 표현함으로써 동탁을 낮추고 여포를 높인다. 동탁은 하찮은데 왜 선생님이 나서시오~라는 말을 한번에 이해가도록 상황을 임팩트 있게 포장하고 이미 그 체급 차이에 관한 스토리를 듣는 사람이 스스로 쓰게 만드는 말이다. 마음에 스토리를 심어버린다. 그러니까 말이 도달되는 사람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게 하느냐를 굉장히 직관적으로 임팩트 있게 프레이밍하는 것이다.
퀸메이커에서 행하는 이슈 조작은 더욱 직접적이다. 재벌이 갑질 이슈로 검찰조사를 받게 되자, 출산 후 경영에 복귀한 지 얼마 안되었고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는 와중에서도 아기를 위해 틈틈이 모유를 유축하는데 검찰의 강압수사로 모성애가 박탈당한다는 스토리의 보도자료를 내게 한다. 갑질의 가해자에 모성애 프레임을 덮어 부정적 이미지를 물타기하는 것이다. 이게 개입된 순간, 누군가 여론을 조작하려 한다는 걸 알더라도 모성애 방해 부분을 형식적으로라도 떨구지 않고서는 원래 계획대로 앞으로 나아가기는 어려운 일이 된다. 이런 스토리를 발굴해 프레임을 만들고 해당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의 행동, 나아가 관점을 바꾸는 게 권모술수 스토리 주인공의 핵심 역량이다..현실세계에서도 어떤 물타기는 먹힌다.
드라마 대행사에도 프레이밍이 등장한다. 대기업 광고주가 회장의 구속을 뒤흔들 여론 조성을 원하는 가운데 능력 있는 광고회사 임원은 국가의 잘못된 판단으로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을 내세워 국가의 압력에 대해 부정적 여론을 조성하고 회장의 보석까지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퀸메이커에서 대기업 전략기획실장이 하던 걸 대행사에서 하는 것으로 패턴은 비슷하다.
부정적인 사례들이지만, 이게 이런 정치나 여론 조작, 권모술수가 아닌 영역에서 이뤄진다면 어떤 임팩트가 날까?
4. 디지털 글쓰기에서의 제목과 카피는 누구에게 이것이 도달하도록 할 것이냐, 어떻게 이 콘텐츠를 바라보게 할 것이냐, 어떻게 더 중요한 것처럼 만들 것이냐를 결정하는 문제다. 단순히 트래픽을 올리는 어그로끄는 제목이 필요한 게 아니다. 내 콘텐츠를 더 중요한 사람에게 더 중요하게 도달하게 만드는 일종의 프레이밍을 하는 카피가 제목이다. 그리고 그렇게 포지셔닝될 수 있는 것이 콘텐츠의 기획 주제가 될 때 임팩트가 난다. 저널리즘에서 프레이밍은 퀸메이커에서 한 것과 같은 부정적인 것을 말하지만, 여기서 프레이밍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일종의 가이드다. 이것을 필요로 할 사람이 자신의 필요를 발견하고 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정철의 카피처럼 대단히 감동적인 것을 해내기는 어렵겠지만.. 중요한 건 단지 트래픽을 유치하는 도구라기보다는 좀더 독자의 관점을 가이드해 내편을 만들어내는 무기라고 하겠다.
제목이나 카피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 서비스나 비즈니스에 관해 말할 때, 다른 사람에게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다른 사람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할 때 중요하다. 프레이밍을 잘하면 타깃은 그에 대해 스토리를 스스로 투영하고 만들어낸다. 결국 브랜드가 하고 싶어하는 것도 이런 것이다. 왜 투자를 원하는 기업이 어느 순간 다 한동안 플랫폼 머시기로, 이제는 ai 머시기로 포지셔닝하는지 그런 곳에도 프레이밍의 중요성에 관한 클루가 있다.
우리는 ~을 혁신합니다 라는 브랜드 카피와 우리는 00제품을 팝니다 라는 브랜드 카피는 다른 인지를 갖게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바라보게 가이드하는 것. 그런 인지를 만드는 일이다.
5. 그러면 그런 좋은 프레이밍, 좋은 카피는 어떻게 만들지? 일단 일조권에 관해 chatGPT도 저런 감동적인 카피를 만들 수 있는지 gpt4를 한번 돌려봤다. 감동까지는 모르겠지만 일부 가능하다. 물러나라! 결사반대!보다 훨씬 좋은 결과물을 줬다.
1. "일조권 침해 반대! 빛을 되찾아주십시오!"
2. "우리 아파트의 햇살을 지켜주세요!"
3. "고층 건물 NO! 햇빛은 우리의 권리입니다!"
4. "일조권 보호, 아파트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
5. "빛을 빼앗기지 마세요! 고층 건물 반대!"
6. 얼마 전에 회자됐던 게시글
https://www.pgr21.com/humor/476548
기가맥히죠. 야구사태의 다른 프레임을 제시하는 제목ㅎㅎ. 의외로 대체 안될 직업이라는 식의 제목의 게시글이었다. 이게 제목만의 문제라기보다는 남들이 다 어떤 얘길 할 때 다른 소재를 어떤 관점으로 다르게 바라보고 그 관점에 맞게 편집된 정보를 전달할 것이냐의 문제.
7. 제목을 쓸 때나 무슨 카피를 작성할 때, 생각해야 하는 건 어떤 문장의 완성도 같은 테크니컬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보게 하고 어떤 스토리를 사람들의 마음에 심을지의 문제다. 문장은 사람 세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를 투영하고 우리의 인지를 형성한다. 그리고 사람은 스토리, 그것도 자신에게 영향력 있는 쪽으로 편집된, 프레이밍된 스토리에 큰 영향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