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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의 허기진 마음을 위로하며,  영화 <집 이야기>

집을 떠난 모든 이들을 위한 영화

2004년 추운 겨울, 홀로 집을 떠나 새로운 도시의 작은 원룸 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참 신기하게도 15년 전 일이지만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을 떠나온 그날은 여전히 생생하게 다가온다. 입김을 호호 불며 시외버스터미널 대합실에 세워둔 캐리어에 기대앉아 아직 오지 않는 고속버스를 기다리며 느낀 차가운 공기, 새로운 곳에서의 시작이 주는 설렘 그리고 암담함까지.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물릴 수는 없었기에 애써 불안을 눌러 담았던 그날. 어쩌면 나는 다시는 우리 집에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우리 네 식구가 같은 집에 모여 사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직감대로 여전히 나는 15년째 집을 떠나 있고 대도시에서 방황을 하고 있다. 그래서 사실 집을 떠나오는 그날,  속으로는 버스가 오지 않았으면 했었다.  


집을 떠나 홀로 사는 사람들은 특유의 '허기짐'이 있다.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만 안 먹을 뿐이지, 회사 구내식당과 지인들과의 저녁 약속 혹은 편의점의 푸짐한 도시락 등으로 집에 살 때보다 끼니를 거르는 일이 거의 없음에도 배가 부른 느낌보다는 허기가 지는 느낌이 더 익숙하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 역시 서울에서 홀로 생활하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고모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이상하게 서울에서는 잘 챙겨 먹어도 배가 항상 고팠다고.

좀 그럴싸하게 표현하자면 집을 떠나게 되면 영혼이 호기롭게 변하는 DNA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집은 무엇이길래 집을 떠난 사람들은 항상 허기가 지고 외로운 걸까. 도대체 집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영화 <집 이야기>를 보고 나면 이 질문에 조금 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신이 살 새로운 '집'을 쉽사리 찾지 못하는 은서


원룸 방에서 홀로 서울살이를 하고 있는 은서(이유영 분). 새로 이사할 집을 찾고 있으나 마음에 드는 집을 못 찾고 있다. 부동산 아저씨는 은서를 위해 신경을 써서 좋은 매물을 보이지만 이상하게 은서는 탐탁지가 않다. 결국 집을 찾기 전까지만 아빠가 홀로 지키고 있는 인천'집' (원래 은서가 살던 집)에 잠깐 짐을 풀기로 결정한다. 인천과 서울까지의 물리적 거리와 함께 자신과 자신의 언니 그리고 엄마까지 아빠를 제외한 가족의 모든 사람들이 떠난 집이기에 정서적 거리 역시 멀지만 은서에게 별다른 선택은 없다. 은서의 아빠 진철(강신일 분) 역시 평소 무뚝뚝한 성격대로 내색은 하지 않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은서를 위해 핑크색 수건을 사두고 은서가 좋아하는 복숭아 김치를 담글 뿐이다. 애틋함보다는 어색한 적막이 더 익숙한 두 부녀의 일시적 '합가 合家'는 과연 순조롭게 끝날 수 있을까?


열쇠집을 운영하는 진철과 종이신문을 만드는 은서.


은서는 자신과 아빠 진철이 서로가 잘 안 맞는다 생각하지만 사실 정말 많이 닮았다. 특히 그 두 사람은 굳이 표현하자면 참 '촌스러운'사람들로 분류할 수 있다. 현관문 도어록은 고칠 수 없다며 손님을 돌려보내는 진철에게 은서가 '아빠랑 나랑은 직업부터 바꿔야겠다'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은서는 사람들이 더 이상 보지 않는 종이신문을 만들고 있으며 진철은 도어록이 현대인들의 필수품이 되어버린 시대에 열쇠집을 운영하며 열쇠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24시간 대기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능숙하게 태세 전환을 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우직하게 하지만 조금은 촌스럽게 밀고 나가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은서의 부녀가 생각하는 '집'의 개념은 보통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 가난과 함께 진철의 가부장적 성격에 이골이 나 떠난 은서의 언니와 엄마가 각각 다른 도시에서 다른 형태의 집과 가정을 꾸렸듯 진철과 은서는 닮은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만의 방식대로 집을 지키거나 새로운 집을 찾고 있다. 영화 속 두 사람이 생각하는 집을 따라가다 보면, 창문도 없는 작고 허름한 집을 고집스레 홀로 지키고 있는 진철이나 좋은 매물이 있음에도 집을 찾지 못해 떠도는 은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조금씩 아빠 진철을 이해하게 되는 은서


지겨웠던 집 혹은 고향을 떠난 주인공이 오랜 시간이 지나 의도치 않게 다시 돌아오는 내용의 영화가 그렇듯 '집 이야기'의 은서 역시 아빠와의 어색한 동거를 통해 자신이 알지 못했던 아빠의 꿈을 알게 되고 평소 이해할 수 없었던 아빠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조금은 뻔한 플롯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서처럼 오래전 집을 떠난, 은서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으로서 '집'에서 다시 만난 은서의 부녀 이야기는 참 아름답고 고맙게 다가온다.

먹고사는 일이 주는 고단함과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지루함에 허덕이는 나와 당신에게 '집'은 어떤 곳인지 잠시 잠깐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우리가 미처 놓친 중요한 것은 없는지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기 전 집을 떠나온 나와 달리 여전히 고향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남동생이 얼마 전 전화가 와서 대뜸 그런다. 안보이던 엄마의 흰머리와 아빠의 깊은 주름이 보이기 시작해 미친 듯이 두렵다고. 집을 떠나온 자는 감당하기도 벅찬 허기로움에 허덕이다 결국 부모의 나이 듦에까지 둔감해지는 것은 아닌지. 은서 역시 그랬을 것이다. 집을 떠나 먹고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허기로움에 취해 집을 지키고 있는 아빠와 집을 떠난 엄마의 나이 듦과 꿈에 대해서는 둔감했을 것이다.


여러모로 참 씁쓸하고 슬픈 영화였지만,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남은 건 과거 가족과 함께 살았던 오래된 집 밖에 없는 진철의 쓸쓸함과 허기로움에 방황하며 조금씩 아빠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은서의 모습을 잘 표현한 배우 강신일과 이유영의 연기 덕분에 더 몰입하며 볼 수 있었던 집 이야기. 아빠와의 어색한 합가를 통해 은서의 오래된 허기로움이 조금이라도 채워지기를 그리고 모든 가족들이 떠난 집을 홀로 지키고 있는 진철의 헛헛함이 조금이라도 해소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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